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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살 Mar 14. 2024

아들, 절대로 모범생이 되지 말아라

공부만! 잘했던 엄마가, 공부는! 못하는 너에게


나는 모범생이었다


"아이가 5학년인데 공부를 너무 안 하려 해.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했어?"


거나하게 회식을 마치고 헤어지려는 찰나, 신촌 밤거리에서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이다.

오랜만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비결을 물어오다니.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에게 공부 잘하는 비결을 물어봤을 정도로 모든 부모에게 '자식 공부 잘하게 하기'는 큰 과제일 게다.

어쩌면 아주 민망한 이 질문에 나는 공부를 잘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고 재빨리 대답했다.


"철이 빨리 들었어요"


그렇다. 나는 공부를 잘했다. 나를 웬만큼 아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정도로.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철이 빨리 들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 엄마는 나의 앞에서 아빠의 무능함을 얘기하기 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어느 정도 사실이었던 것은 인정한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직업이었다. 비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아주 작았다. 노동에 비해 벌어오는 돈이 적다는 단순한 사실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남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어 늘 손해를 본다는. 하소연과 푸념이었다.


실제로 어느 날 옷장의 모든 옷이 꺼내져 나오고 그것이 가방에 담겨 나가네, 마네, 죽네, 사네 하던 말들이 오가던 날의 기억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옷장 안에 자리한 옥돌장판들이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벌이를 해결하겠다며 옥돌장판의 피라미드 세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안 되어 남에게는 하나도 판매하지 못하고 우리 집 장롱 안에만 차곡차곡 쌓여가던 길이었을 것이다. 최근에도 만병을 낫게 한다는 신비한 생명수라며 집 한편에 그냥 하얀 물들을 쌓아 놓기도 한 아빠였다. 검색결과 차라리 생수였다면 나으련만,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어 건강을 오히려 해칠 수도 있다고 방송에 사기 혐의로 나왔던 물들이었다.


본업은 목수였다. 우리 집 인테리어를 맡아 어느 부분의 일을 아빠가 담당해 하기까지, 나는 아빠가 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밤에 돌아온 아빠의 작업복은 늘 먼지 투성이었고, 달려드는 나를 안아주려 하며 엄마는 재빨리 말리고 아빠를 깨끗이 씻고 오라며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모든 아빠들은 그렇다는 것을 뒤늦게 나의 아이의 아빠, 남편을 보면서 뒤늦게 깨닫긴 했지만) 아빠는 어느 곳에나 머리만 대면 무서운 크기로 코를 골며 쓰러졌고, 항상 피곤했고, 가끔 다쳤으며, 자주 아팠다. 손톱에 든 멍이, 대충 감아 놓은 밴드가, 온몸에 상처가 어린 나이에도 보였다. 모른 척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것이 아빠를 위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를 위해 저토록 열심히 일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렴, 보답해야지" 아니면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처럼 힘든 일은 하지 말아야지."

엄마의 협박과 회유는 항상 그 둘 사이를 오갔다.

아빠를 위해서라는 이유, 또는 아빠처럼 되지 말라는 이유. 유일한 탈출의 길은 공부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의 성적은 항상 엄마를 기쁘게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마도 다른 아이들에게는 늘 원망의 대상인 그 유명한 '엄마 친구의 딸'이었을 게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 그 계획에서 어긋나면 못 견뎌하고, 공부하고 남는 시간은 독서로 채웠다. 몇 개  틀린 시험지를 보며 부르르 떨었고 그리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모범생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아이가 나처럼 모범생 딱지를 스스로에게 붙이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모범생이 아니라, 범생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범생'이었다. 모범(模範)의 뜻은 학업과 품행이 본받고 따라 하고 싶다는 뜻일진대, 나는 누구나 모방, 그러니까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범생이었던 나의 삶을 뒤돌아보면 대충 이랬다.


범생은 친구가 없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아는가.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나는 항상 나와 비슷한 무리 사이에서만 어울렸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모아 놓는다는 특수한 '목적'이 있는 특목고에 진학했고, 우리 반 아이들 절반 이상이 입학한 SKY 대학 중 한 곳에 들어갔다. 고만고만한 삶을 거쳐 사회에 나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야 깨달았다. 모범생은 친구가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친구라 불렀던 이들은 친구라 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공부를 잘해 본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자면 공부를 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이기심'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일정 점수 이상을 받기 위해서는 남보다는 '나'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셈은 어찌나 빠른지 내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빠르게 계산해 낼 수 있었다. 같이 떡볶이를 먹자는 친구들의 제안에 먹고 집에 돌아가기까지 소요되는 시간과, 시험기간 전에 도덕 교과서 1단원을 한 번 더 볼 수 있는 시간을 비교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과 다른 사람에게 투자해야 하는 것을 늘 속으로 계산하게 됐다. 그리고, 모두가 알듯 그런 사람은 진정한 친구를 만들기 어렵다.


범생은 순종적이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 한 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1+1=2라고 하면 그냥 외웠다. 선생님이 1+1=3이라고 했다면 그렇게 외워 답으로 적었을 것이다. 정해진 길이 최선이라 믿었으며 의심을 품지 않았다. 호기심도 없었고 탐구정신도 없었다. 왜? 냐고 묻고 생각할 시간에 그저 받아들였다. 일탈은 없었지만 그래서 큰 도전도 없었다.


범생은 공부만 잘한다.

부끄럽지만 나는 공부 밖에 잘하는 것이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험에서 성적을 잘 받는 것을 의미하며 시험에 나올만한 것을 잘 안다는 것이다. 지혜롭다는 것, 똑똑하다는 것, 현명하고, 일을 잘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나는 학교가, 시험이 요구하는 것만을 맞춰 내었다. 그리고 스스로 성과 목표를 세우고 해야 하는 사회에 던져지자 길을 잃었다.


범생은 비판에 취약하다

내가 공부를 잘한 이유 중 하나는 잔소리가 싫어서였다. 간섭과 참견을 못 견뎠다.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고 나면 다른 부분이 얼마나 엉망이든 면죄부를 얻었다. 방은 더러웠고, 밥을 먹고 숟가락 하나 설거지통에 넣지 않았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 3 시절, 모든 아이들은 10시까지 자율학습이 의무였지만 중간고사에서 반 1등을 한 후에 '저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게 더 잘 돼요'라고 말하자 나는 자율학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학생으로서 높은 접수는 내 맘대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었다. 그렇게 나의 학창 시절은 칭찬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누군가 나를 지적하는 소리를 하려 하면 얼굴 끝까지 스멀스멀 열이 올라왔다. 모독이나 비난이 아니라 건전하게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하는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고 쳐냈다. 작은 비판에도 쪼그라들었고, 상처받았다. 시련이나 고난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것을 극복할 기회도 얻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감당하지 못할, 잘하지 못할 영역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너는 잘한다'라는 평가를 받지 못할까 봐 겁이 났던 까닭이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나의 아이가 나처럼 모범생이 되어 공부만을 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공부'만이 집안을 살릴 유일한 방안이라 믿고 무게를 짊어지길 원하지 않는다.

속으로 이득과 손해를 빠르게 따져 계산적으로 인생에 임하기를, 그래서 친구들을 등한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에 순순히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공부를 잘해' 라며 인생에 주어진 과제가 단지 시험 점수인 양 믿고 우쭐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행히도 (?) 나의 아이는 공부를 잘하지 않고 있다..... 는 해피엔딩을 가장한 새드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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