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예의는
'너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자세다.
각자의 내면에 훌륭한 교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연장이 망치일 때는 모든 대상을 튀어나온 못으로 보게 된다.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해서 그 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 길은 많은 옳은 길 중의 하나일 뿐이다.
행복한 관계는 비평이나 조언이 아니라
상대방의 '순수 존재'를 있는 그래도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
in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
올해, 나의 첫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은 당연히 '튀어나온 못'이기에 나는 오늘도 '망치'를 들고 아이의 교육을 위해 나선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모든 일에 도전해봐야 하는 이유, 열정을 품어야 하는 이유.
일일히 일러주고, 알려주고, 가르쳐 주느라
우리가 나누는 말은 '대화'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조언' (아마도 아이에게는 와닿지 않는 '잔소리')이 되고만다
한 시도 쉴 새 없이 말을 하는 아이였는데, 오히려 그래서 나는 점점 아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말들은 어디에도 남지 않고 어디론가로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아이는 늘 말 끝에 "엄마?"를 붙이는 버릇이 생겼다. 분명 내가 대답해야 할 타이밍인데 아무 반응이 없자 붙이는 말이다. 처음에는 듣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려 그마저도 듣기 싫은 소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 길지 않은 대화의 시간인데도 나는 아이와 대화를 할 때마다 뭔가 '교훈'을 주어야겠다, '가르침'을 줘야겠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언제나 끝은 내가 아이의 행동을, 말을 보면서 고쳐줘야겠다 생각했던 것으로 맺어진다.
예를 들면
"엄마, 나 태권도에서 이거 배워서 이제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어요. 물구나무를 다른 사람들은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팔에 힘을 주면서 두 다리를 들어 올리는 건데, 나는 바로 앞구르기를 하면서 설 수 있어요. 그건 팔에 힘이 세서 그런 거예요. 그죠. 응, 엄마?"
라는 말을 하면서 아들은 직접 다른 이들이 물구나무를 서는 모습 시늉을 보이고,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자세를 선보이고, 팔뚝을 치켜들어 보인다. 그러는 사이에 바닥은 쿵쿵 울리고, 아랫집이 신경 쓰이는 나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조용히 좀 행동할 수 없냐며 꾸짖고, 잘못하다 한쪽에 세워 놓은 이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고, 그러면 또 주변을 잘 살피지 않고 몸을 움직인 데 대한 지적이 뒤따른다. 또 잘못하면 목이 삐끗해서 전신 마비에 이르는 상상까지 다다르고 '그런 심한 장난은 하지 않아줬으면 한다'로 끝내 아이가 자랑한 행위를 모두 하지 말아야 할 일로 규정해 버리고는 만다.
오늘의 대화도 그랬다.
"엄마, 나는 미래에 가 보고 싶어요. 내가 뭐가 됐는지 너무 궁금해요"
라는 말에 또 '교훈'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게 아니지. 네가 만드는 거야"
(이렇게 까지 뱉어놓고는 오~ 좋은 말이야라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내 꿈이 이뤄졌을지 너무 궁금해요. 타임머신 같은 것을 타고 가서 봤으면 좋겠어요"
"네가 보고 오면 미래가 변할지도 몰라. 만약에 네가 미래에 가 봤는데, 엄청 아파. 그럼 행복하겠어?"
"만약에 네가 봤는데 좋은 대학을 다니고 성공해 있어. 그러면 돌아와서 네가 열심히 안 하면 그 모습이 안 될지도 몰라. 아니면 꿈을 못 이뤘으면 와서 열심히 하면 그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거야. 너는 그냥 열심히 해서 그냥 니 꿈을 이루면 돼"
훗. 나는 아이에게 "알았어요. 엄마 말대로 정말 열심히 해서 꿈을 이뤄야겠어요"라는 모범적인,
그러나 말도 안 되는 대답이 나오리라고 감히 원했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아이는 의외의 질문을 또 내놓았다.
"그럼 엄마는 열심히 살지 않았어요?"
아.. 아..
나는 아이의 눈에는 '꿈을 이루지 못한 상태', '아무것도 되어 있지 못한 상태"인 것일까.
고작 나는 너의 엄마만이 되어 있을 뿐인가.
한 번은 또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지 않을래요. 좋은 대학을 나와도 엄마처럼 돈을 벌지 못하고 있잖아요"
라는 대답을 들은 적도 있다.
아마도 "공부를 열심히 해라. 좋은 대학에 가라. 그래야 힘든 일을 하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번단다"
뭐 이따위의 이야기를 하던 끝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아이의 꿈은 자주 바뀌었다. 피아노 학원을 다녀온 어느 날은 피아니스트였다가, 바이올리니스트도 되었다가, 모든 남자아이들의 로망인 축구선수를 지나 요즘에는 태권도 사범님이 적극 추천했다는 '한 번 공연하면 매일 100만 원씩 받는 ' 해외 태권도 시범단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혀왔다. 그럴 때마다 '니 실력으로는 축구선수는 어림없어', '피아니스트 되려면 유럽에 유학 다녀와야 해', '태권도 시범단 몇 살까지 하겠니?'라는 이미 어른이 되어 버렸음이 틀림없는 속물 엄마의 속마음은 꾹꾹 눌러 담고 "오~ 멋있겠다.' 뒤에 '그래! 뭐든 열심히만 한다면 너는 다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대답을 들려줬던 나에게 돌아온 대답이 바로 이것이란 말인가.
'엄마는 열심히 하지 않아서, 꿈을 이루지 못했냐는 그 말'
엄마는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지금은 꿈이 뭐예요?라는 말에도 나름대로 대답을 잘해 왔다고 믿었다.
'가족', '희생', '엄마' 따위는 거론하지 않고, '세계를 여행하는 것', '글을 쓰는 것', '책을 만드는 것' 등 실제로 한때는 열렬히 꿈꿨던 것이었으며 지금 시작해도 할 수 있다고 나 자신도 믿는 것들을 나의 꿈이라고 말해줬었다.
이제 내 주변의 그 누구도, 네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나의 꿈을 묻지는 않는 나이가 되었다고.
나의 꿈으로 나를 소개할 상황은 아니라고. 차마 얘기하지 않았었다.
내일의 나도 오늘의 나와 그리 다를 것 없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먼 미래의 나도 지금의 나와 그리 다를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엄마는 꿈을 꾸지 않는다고.
무언가가 되겠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그 무엇도 되지 못했음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고.
그렇지만 10살 아이는 이미 느끼고 있었나 보다. 초라함과 당혹감이 밀려왔다. 그 어떤 대답도 내놓지 못하고 그저 '뭐야, 이 녀석아'라는 말로 흐지부지 대화를 마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오래도록 짧았던 그 대화를 곱씹어 본다.
나는 열심히 살아서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할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스스로 또 합리화를 하며 교훈 섞인 대답을 찾아냈다.
어디선가 '하다'와 '되다'의 차이를 본 적이 있다고. 어릴 때에는 무언가 '되다'에 집착하는 거라고.작가가 된다. 아나운서가 된다. 기자가 된다. 피아니스트가 된다. 등등 하지만 어른이 되면. 무언가 '하다'라고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 한거라고. '글을 쓴다'는 작가가 되지 못했다고 해도 글을 쓰고 있는 행위를 하고 있으면 이 엄마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이 아닐까.
그렇게 잠시 떠나 있던 브런치에 다시 글을 써 본다.
거창한 이름의 무언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무언가는 '하고'있는 엄마가 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