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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화 Oct 28. 2024

끌어당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아버지의 장례식은 넷이나 되는 자식들 덕분에 다행히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조문객이 찾아왔고 각 단체나 지인들 덕분에 영안실 앞이 화환으로 가득 찼다.

조문객들로 영안실이 북적북적 대자 이 와중에도 쓸쓸하게 보내 드리지 않게 된 것이 덜 미안하고 위안이 되었다.

"아버지 가시는 길은 그래도 외롭지 않네. 아버지 마지막 복은 있으시다." 엄마한테 그렇게 말했다.

조문객을 맞느라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오빠가 내게 다가왔다.

"경아~ 인사해. 너 기억 안 나지?"

그러고 보니 오빠 옆에 모르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오빠의 지인이려니 하고 대뜸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그 중년의 남자는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키는 175센티 안 넘어 보이고 약간 살집이 있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옷차림이 세련된 것으로 보아 외모에 꽤 신경을 쓰는 사람 같았다. 오빠 지인 중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누군지 궁금했다

"노민호라고 기억 안 나지?" 어색하게 서 있는 내게 오빠가 물었다.

모르는 이름이고 혹시 상대방은 나를 아는데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싶어 당황했다.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던 걸까 막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하는데 그 중년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기억 안 날 거야. 형. 워낙 어렸을 때라"

노민호라 근데 어렸을 때 알던 사이라고? 그때 꺼졌던 전구에 반짝하고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 마냥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말문이 막혀 멍청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몇 달 전에 엄마가 준 낡은 사진 한 장. 발가벗은 채, 있는 인상 없는 인상을 다 쓰면서도 손을 꼭 잡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귀엽고 예쁜 아가들. 그중 여아는 나였고 남아는 민호라고 했다.

그 사진은 엄마한테서 넘겨받아 지금 사진첩에 고이 들어 있는데...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살아 있을 동안은 서로 만날 수 없을 거라 단정하며 추억으로 남겼는데... 그 민호가 중년의 남자가 되어 아버지 장례식에 왔다.

멍해지며 환각이 왔다. 이렇게 다시 만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수십의 세월을 각자의 세계에서 살다가 한순간에 유체이탈 하듯 같은 시간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구나...신기했다.

"정말? 민호? 노민호라고요?" 나는 살짝 톤을 높였다. 비현실적이라 믿기 어렵고 정신은 혼미했지만 일단은 반가운 척은 해야 할 거 같았다.

"네가 식사하는 것 좀 챙기고 있어. 친구들 좀 보고 올게"오빠가 노민호를 내게 맡기고 자리를 떴다.

"금방 차려 줄게요. 여기 앉아 계세요" 그를 자리에 앉히고 나는 음식을 챙기러 도우미 아줌마들한테 갔다.

"여기 상 좀 차려 주세요" 하고 부탁을 하고 금방 돌아와 노민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색한 시간을 없애려는 듯 앉자마자 노민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말 놓아도 돼. 나이가 같아."라고 말했다.

나는 나이가 같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 그래요? 같구나 나이가. 말 놓을 게"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이을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조금 후

"어떻게 알고 왔어?" 이번에는 내가 먼저 물었다.

"가끔 형하고 연락만 하고 지내는데 소식을 보냈어. 마침 한국에 있을 때여서 올 수 있었어." 그가 말했다.

"한국에 안 사는구나? 어려운 걸음 했네."

"왔다 갔다 하며 살아. 사업상 또 애들이 미국에 있고 해서." 그의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듣기 편했다. 하지만 너무 모르는 사이다 보니 뭐부터 물어야 할지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그리고 또 만난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뭔가를 물어야 할지 말지 생각이 많아졌다.

무슨 질문을 해도 뜬금없을 거 같았다.

"난 6살쯤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가서. 거기서 쭈욱 살았어. 지금은 사업상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있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친근하게 다가오려는 시도로 느껴졌다.

풍기는 분위기로 볼 때 그는 성공한 사업가 같았다. 그렇지만 처지가 처지인 만큼 나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색해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때 다행히 대학교 선배들이 몰려왔다. '아! 잘 됐다' 타이밍이 좋았다.

"미안해~ 선배들이 와서" 미안한 몸짓을 하자 그는 손 사레를 쳤다.

"아냐 아냐 나도 얼른 일어나야 돼. 식사는 알아서 할 테니까 가 봐." 때마침 오빠가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미안한데..."

"괜찮아" 그는 아쉬운 표정을 애써 숨겼다. 나는 왜 그렇게 느꼈을까 그가 아쉬워한다고...

"장례식 끝나고 한번 만나자. 내 전화번호 줄게."

나는 뭐라고? 진심이야? 예의상 하는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전화번호를 받아 저장했다.

그리고 서두르는 척하며 선배들 테이블로 갔다.

운동권선배들이시다. 후배를 위로해 주겠다며 한 시름에 달려와 준 선배들이 어찌나 고맙던지 황송할 따름이었다. 선배들은 고생한다면서 건강도 챙겨 가며 상주 노릇하라면서도 술을 권했다. 원래 술에 약한데 이 날은 스무드하게 넘어갔다. 술이 고팠던 사람처럼.

선배들과 한참 자리를 같이 했고 술을 주고받으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노민호에 대해 까맣게 잊었다. 다시 볼지 말지 알 수 없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 했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낯설었던 그가 그닥 반갑지도 관심도 가지 않았다.

선배들이 돌아가고 한참 후에야 노민호가 간단 말없이 조용히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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