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시간 개념이 사라졌다.
5개월 밖에 안 됐는데 느낌적으론 더 오랜 날을 여기 머무른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정선에 오기 전의 일 들이 연무처럼 흐릿하다. 먼 옛날 같다.
오늘 하루도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책을 끼고 있었는데 실제로 읽은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거실의 원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니 어둑어둑하다. 놀라서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6시가 조금 넘었다. 산골의 겨울은 깊은 숲 속처럼 해가 일찍 진다. 하루 해가 너무 짧아 자칫 방심하다간 일하다 말고 손을 놓아야 할지 모른다.
농사를 짓는 집은 겨울에도 할 일이 많다. 하우스에서 모종도 키워야 되고 나무 전지도 해야 되고 그동안 쓰기 바빴던 농기구도 손봐놔야 되고 등등...
작물을 거두다 찢겨 나간 검정 비닐만 나풀대는 황량한 겨울 밭이지만 언 땅 아래서는 미생물들이 에너지를 비축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농부도 아니고 미생물도 아니니 겨울에 할 일이 없다.
하얀 나무줄기만 꼿꼿이 서 있는 겨울 산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여서 가깝게 느껴진다.
모노톤의 한 없이 차가운 삭막함이 산골 겨울이 보여주는 별미이다.
겨울에 자연을 둘러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얼어 버린 차가운 땅과 딱딱한 가죽만 남은 나뭇가지에서 봄이 되면 뭔가가(생명이) 올라오고 여름이 되면 틈이 없을 정도로 푸르름으로 꽉 차 버린다는 사실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창가에 세워둔 기다란 대나무 막대로 아쉬움을 달래 듯 천천히 커튼을 닫았다. 새 하얗게 빛나던 해가 어느 사이 물러갔다. 매일 아쉽다.
어둠이 옴과 동시에 망령 같은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옆구리에 들러붙는다. 그놈과 같이 TV를 보고 음악을 듣고 사색을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든다.
잠이 들어야 비로소 모든 고락을 잊는다. 그놈이 들어붙어 자는지 도망을 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악몽을 꾸지 않고 깊게 오래 잠들기를 바랄 뿐이다.
10시가 조금 지났는데 인천에 사는 아는 동생 은경이 한테 전화가 왔다.
나보다 5살이나 어리지만 철이 일찍 들어 그런지 코드도 잘 맞고 어느 땐 언니 같기도 하다.
은경이는 특유의 높은 톤과 밝은 목소리로 "책 보고 글 쓰면서 지내시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생생한 목소리로 잘 웃지만 속내는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그녀다.
종종 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주는 게 너무 고맙다.
"여기선 할게 그거밖에 없어"
전화를 받다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찻잔을 건드려 남아 있던 식은 카모마일 차가 쏟아졌다. 얼른 옆에 있는 휴지를 풀어서 닦았다. 그리고 물 먹은 휴지를 버리기 위해 부엌으로 뛰어갔다.
주방에서 냄새나는 게 싫어서 쓰레기통을 부엌문 앞에 놓았는데 밤에는 거의 쓰레기를 버리지 않지만 지금은 이 휴지를 버려야 할 거 같다. 부엌문을 여니 차가운 밤공기가 잠깐 사이에도 살갗을 에인다. 몸서리를 치며 얼른 문을 닫았다.
언젠가 은경이와 만나 서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녀도 남편 때문에 속이 무지 시끄럽다.
은경이는 20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갔다.
내가 결혼을 했다고 하지 않고 시집을 갔다고 하는 것은 그녀의 결혼 생활이 너무 암담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의 지독한 시집살이는 당연했고 남편은... 남의 편을 내가 뭐라고 할 바는 아니지만 요즘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구나 싶은 정도로 여자를 무시하고 대놓고 오입질을 하고 종처럼 부려 먹었다.
미경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이 딱딱 벌어진다.
조선시대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 같기 때문이다.
몰래몰래 바람피우고 잔머리 굴리며 거짓말하는 인간은 그에 비하면 손톱만큼은 인간적이라고 해야 하나 싶은 정도로...
그러나 그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참으로 비열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기는 마찬 가지다.
나도 못하는 이혼이었지만 은경이야말로 이혼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몇 번을 이혼하라고 했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은경이는 이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처지였다.
남편이 재산이 많다 보니 이혼을 안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애인과 같이 살면서 은경이 한테는 생활비를 넉넉히 주는 것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은경이 남편은 재벌도 아니면서 그래 몇 백억 있다 치자 그 정도의 돈으로 아들 딸 낳고 재산을 형성하기까지의 공도 무참히 묵살하고 세컨드 하우스에서 애인과 같이 살면서 아내를 몇 십 년간 독수 공방 시키는 인간이라니...
바람은 돈이 있어도 피고 없어도 피는구나... 싶은 거지...
바람피우는 남편 꼴을 보며 우리는 왜 허수아비처럼 묵묵히 참고만 사는지...
그런데 사실 바람피우는 인간들은 거의 다 폭력적이고 가학적이다.
쾌락을 부릴 때만 부드럽고 친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의 상대자는 조강지처를 버리면서 까지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고 언제든 조강치처 보다 더 비참한 처지로 내몰릴 수 있다.
조강지처와 가정을 버린 인간을 좋다고 만나는 인간은 또 뭔가 싶다.
그날, 은경이는 다 내려놓았다고 말했다. 내려놓고 내려놓고 하다 보니 이젠 좀 많이 내려놓아진 거 같다고... 하니깐 되더라고... 말했다.
잘했다고 대단하다고 칭찬과 위로를 받고 싶었을 게다.
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되물었다. "정말? 내려놨어? "
시니컬한 내 반응에 그녀는 당황했다. 그리고 자신이 없는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응... 많이 내려 논거 같아..."라고 말했다.
"아니야 넌 내려놓은 게 아니야. 내려놓는 게 뭔데? 내려놓음이 뭐야? 그걸 알아야 내려놓지..."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더욱 당황해했다. 그리고 말을 바로 받지 못하더니 잠시 후에 되물었다.
"그럼 언니는 알아?"
"아니, 나도 몰라"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모르지만 적어도 그렇게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는 건 내려놓음이 아니란 건 알아. 그건 단념이고 포기이고 체념이야"
"아! 그런가?" 그녀는 내 말에 더욱 자신이 없어진 거 같았다.
"단념, 포기, 체념은 내려놓음이 아니야. 그건 이쪽 물건을 저쪽으로 옮겨 놓은 것뿐이야. 그래서 언제든지 다시 되돌아가지.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려야 하는데 말이야."
나는 계속 말했다.
"다만 자리를 옮겨 놓았을 뿐인데 내려놓았다고 착각하고는 계속 끌려다니는 거야. 죽을 때까지 끌려다닐 거야. 없앨 수 없어. 사라지게 만들 수 없다고... 그게 가능해? 난 못한다고 봐. 그리고 했다는 사람은 다 가짜야. 자신을 속이는 짓이지."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말을 인정하기 어려운 거 같았다. 그럼 지금까지 헛고생을 했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하겠지.
'그래. 은경아 헛고생한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을 했다.
"그럼 어떻게 해? 내려놓은 게 아니면?" 그녀가 서글픈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시간에 맡겨. 억지로 내려놓으려고 애쓸 필요 없어. 자신까지 속이면 더 슬프잖아..."
"그러네. 그렇다면 내가 더 불쌍해지네... 언니 우리는 왜 이렇게 불쌍하게 사는 거야?" 그녀의 상심이 나의 폐부를 찌르며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음도 내가 아니고 생각도 내가 아니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뭔가 이분법적인 분리를 당하는 느낌이다.
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 모든 것들이 "나"라고 단언한다.
내가 아니라면 그런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하겠나.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모두 나다. 그걸 부정하면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
내가 아닌 마음과 생각이 어딘가에서 불쑥 나와선 나를 마구 쥐고 흔들고 나를 나로 아니게 만든다는 거.
이게 말이 되나 싶다.
마음과 생각이 그냥 '나'라고 해도 문제를 해결하는 덴 전혀 문제가 없다.
나는 마음과 생각과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으로 똘똘 뭉친 실체적 존재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그런 것이다.
나약한...
모든 상념을 시간에 내 맡기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