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산골의 매서운 겨울바람을 뒤로하고 민호는 아침 일찍 서울로 떠났다.
그의 취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아침으로 간단하게 계란을 입힌 토스트와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만들어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아메리카노보다 라테를 즐겨 마셨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커피취향도 나랑 같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영이 그를 나와 연결시켜 주었다는 환상을 믿는 나로서는 그 생각 이후부터 어떻게든 서로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거 같았다.
그렇지만 이런 점이 나의 못 말리는 핸디캡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한편으론 두려웠다.
이런 점... 사람을 너무 믿어 버리는 성격.
기본적으로는 성선설을 믿고 가진 것이 너무 없기 때문에 사기를 당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점, 내가 사기를 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상대방도 나한 테 사기를 치지 않을 거라고 믿는 밑도 끝도 없는 신뢰...
짧은 동안 민호가 보여 준 훌륭한 태도는 믿음을 주기에 내 입장으로선 충분했다.
사기꾼은 아닌 거 같다... 고 믿기에 이르렀다.
내게 사기 칠 이유가 없지 않나 내지는 나는 이용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도 했던 생각이다.
운동권 선배가 나를 이용하고 배신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는 민족과 정의를 위해 목숨 걸고 데모를 하는 진보주의 자니까...
데모를 하던 당시 배신은 정말이지 서로의 목숨은 물론 조직의 분열이나 와해 또는 조직원들의 목숨까지도 담보할 만큼의 엄청난 타격이기 때문에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의 이안 감독의 '색계'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야 말로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 싶을 정도로 인상 깊은 작품인데 나는 네 번이나 보았다.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왕자즈가 이모청에게 귀속말로 "도망가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엄연한 배신이었다.
왕자즈가 정숙한 숙녀로 위장해 일본군 친위대장 이모청을 유혹하고 불륜을 나누며 그의 신뢰와 사랑을 얻는 데 성공하지만 그 신뢰와 사랑이 치명적인 독약이었다. 그걸 마신 왕자즈는 앞 뒤 생각 없이 백치처럼 이모청을 구해야겠다는 선택을 한다.
결과는 왕자즈 자신뿐 아니라 그의 조직원 모두가 캄캄한 새벽 추운 바닷가 백사장에서 무참히 총살을 당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모청이 왕자즈 만은 총살형에서 빼내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런 요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뢰와 사랑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우면 가차 없이 내다 버릴 수 있는 허무한 것이었다.
왕자즈의 배신과 이모청의 배신으로 점철된 로맨스 영화였다.
배신이 이렇게 무섭고 잔인하다.
이 영화가 인상 깊고 충격적이었던 것은 두 남녀의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사랑의 행위 보다 왕자즈가 포승줄에 묶여 총살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이었다.
이모청은 목숨 걸고 사랑한 애인을... 한낯 이데올로기의 희생재물로 바쳤다.
사실 나의 뇌리엔 배신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남편한테 오지게 당하고 나서야 아! 사람들이 말하는 그리고 영화를 통해 본 그 배신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를 알았다.
와! 어떻게 20년을 넘게 같이 살아 놓고 배신을 해??
내 사고방식과 상식과 정신세계와 가치관과 개념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또는 남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꼬장을 부려도 그렇게 억지스러울 수 있을까... 사사건건 싸움을 거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었다.
마치 말 안 듣는 7살짜리 사내아이를 보는 거 같았다.
말 귀를 못 알아듣는 건 아닌데 반항하고 떼쓰고 어깃장을 부리는 막무가내 꼬맹이.
사춘기의 중 2보다 더 질이 떨어지는...
남편의 그런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를 다니는 10년 정도는 누구나 칭찬하는 애처가에 공처가였으니까 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교회를 등한시하고 교회 사람들을 흉보더니 점점 교회자체에 대해 부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사귀던 여자가 불교신자였던 모양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배신을 당한 뒤 뒤돌아 생각해 보니 다 계획된 행동들이었다.
어떻게든 정을 떼고 자신의 불륜을 합리와 내지는 정당화하려는...
인지부조화라고 할 까... 정신분열증이라 할까...
부러움과 존경까지 받던 자신이 불륜을 저지르자... 이렇게 까지 타락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겠지...
하나님마저도 부정하고 불륜의 탓을 아내에게 돌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를 지어도 지옥에 갈 일이 없고 불륜을 저지른 건 아내가 자신에게 집착하고 무시하고 화를 냈기 때문이니까 자기는 잘못이 없는 것이었다.
당하고 보니까 세상의 불륜이 어떻게 일어나고 그 진행과정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또 그 과정에서 인간성은 어떻게 말살되는지... 가정을 파괴한 범죄자들의 행동양태라고 할까 마인드는 어떻게 변화돼 가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으면 이혼을 하고 정당하게 만났어야 했다. 그렇게 애인을 사랑했다면...
사실 남편은 이혼 할 용기가 없었다.
세상에 내놓을 명분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리 끝에 찾아낸 이유가 내 인생 운운이었다.
내 인생을 찾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것이 먹히지 않자 다른 이유를 만들었다.
내가 자기의 자존감을 무너뜨렸으며 시어머니 욕을 하고 다니고 자기를 스토킹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세 가지는 모두 다 내 반박을 받았으며 한 가지도 동의를 얻지 못했다.
다 거짓말이고 억지였기 때문이다.
그 후 남편의 유리 멘털은 급작스럽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의 불륜을 합리화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단으로 남편은 나를 얼음처럼 차갑게 남처럼무심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 계획은 먹혔다. 별거를 하게 되었으니 목표의 80%는 달성한 셈이다.
이쯤에서 이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인지부조화에 유리 멘털이 무너진 남편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으면 그냥 조용히 정리하고 떠났어야지 나를 너무 아프게 했다.
뼛속 세포 한 알 한 알까지 소름이 돋고 구역질 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