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세 살 위인 친오빠는 한창 록 음악에 빠져있었다. 서태지를 유독 좋아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크라잉 넛부터 린킨파크 등 국내외 락스타들의 cd를 사 모으기 시작했고 나도 그의 취향을 따라 그런 음악들을 듣기 시작했다. 수북이 쌓인 그의 cd 중, 나는 서태지의 음악이 가장 좋았고 어린 나이에 자연스럽게 서태지의 팬이 됐다.
사실 음악적으로 볼 때, 지극히 내 기준이지만 서태지의 서정적인 가사 필력과 음악적 순수함을 따라올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아직도 내 멜론 속에는 시대유감, 슬픈아픔, 필승, take 5, 너에게, 영원 등 다수의 곡들이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그의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이다. 배우 이지아와의 사건, 아니 스캔들이라고 불러야 옳은 걸까. 그 스캔들 이후로 서태지의 이미지가 추락한 것에 가슴이 아팠던 것도 나였다. 적어도 나에겐, 그의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굉장히 순수했고 공감대를 이루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그의 개인적 평판이 음악 실력을 얼룩지게 하는 게 못마땅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느꼈던 순간은 어린 시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가사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특히 서태지의 곡 중, '너에게'라는 곡에 이런 가사가 있다. '너의 말들을 웃어넘기는/나의 마음을 너는 모르겠지./너의 모든 걸 좋아하지만/지금 나에겐 두려움이 앞서/(...)'. 굉장히 좋아했던 노래였는데 사실 어렸을 적 나는 수백 번을 들어도 이 가사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두려움이 앞서나. 도대체 왜, 나는 네가 좋아진 그다음부터 깊은 한숨만 늘은 걸까. 아직 덜 익은 머리로 아무리 공감하려 노력해도 공감되지 않던 문구가 어느 순간 마음 깊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가사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으며 공감하게 된 걸 보면 나도 이제 머리가 익어가나 보다.
몇 달 전 친한 사람이 단톡방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나는 이제 이 등산이 지쳐간다. 올라갈수록 고지는 보이지 않고 오르막길만 계속된다. 그래서 나는 이 산을 이제 그만 내려가려 한다.' 나는 그의 문장을 읽고 단숨에 큰일이 났음을, 그가 이제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같은 단톡방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은 같은 글을 읽고 엉뚱한 대답을 보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지금 등산하고 있어?' 해당 카톡을 보고 말문이 막힌 건 아니었다. 그저, 그는 문맥만 읽었을 뿐, 문장 안에 있던 메타포어를 해석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너무도 많은 메타포어가 존재하고 그걸 이해해 주길 바라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나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세상은 점점 직관적이고, 단답적이고, 짧은 문장을 요구하면서 패스트 푸드화 되고 있다.
복잡한 문학을, 영화를, 음악을,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복잡해서다. 이런 것들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 한번 듣고 보면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두 번 봐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 머리가 익어갈 때쯤, '아, 그래서였군..'라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사실 나는 아직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데이지를 옷방으로 데려가 고급 셔츠를 몽땅 꺼내줬는지, 그 행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개츠비는 정말 외로운 사람이었고, 과거에 머무는,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덫에 묶여 죽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데이지에게 던져줬던 고급 셔츠들은 단순히 부에 대한 자랑이었을까. 아니면 형형색색의 고운 셔츠는 데이지를 향한 그의 사랑의 색채를 표현하기 위한거였을까.
세상은 점점 더 패스트 푸드화 될 거다. 나는 그냥 그 속에서 복잡한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가끔은 당장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시간이 지나고 곱씹을수록 맛이 살아나는 약재처럼 나의 말도 누군가의 머리가 익어갈수록, 곱씹을수록 살아나는 힘이 있기를, 그리고 감정이 살아있는 말이 되기를 노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