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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나마나

냉탕과 온탕 사이

by 고로케


지난달이었다. 갑자기 수영 선생님이 하반기부터 못 나올 거라 했다. 사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의 수업방식이 항상 별로였기에 그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브레이크 댄스를 췄다. 그래도 6개월을 함께 한 선생님이기에 아주 조금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이름도 모르는 선생님한테 다가가 왜 그만두냐고 물어볼 정도로 딱히 사유가 궁금하진 않았다. 그냥 그 사람은 나에게 일주일에 두 번, 자유 수영을 제외하고 한 달에 7번 만나는 수영 선생에 불과했다.


어느 날은 그냥 선생님을 빤히 쳐다보다가 왜 관두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항상 내가 먼저 말을 거는, 엄밀히 말하자면 가끔은 이상하고 엉뚱한 내 말에 항상 꾸준히 대답해주는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은 왜 관둔대요? 민원 때문인가요?"

"민원 넣었어요?"

"네, 근데 저는 락스물 얘기만 했어요. 지난주인가, 수영하고 나니 혀가 마비되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음, 그랬어요..? 여튼 선생님은 공무원 준비할 거래요. 시험공부해야 해서 이제 못 나온데요."


공무원은 선생님과 전혀 안 어울리는데. 샤워실로 가면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선생님은 수업방식이 탑다운 형식이었다. 인사도 없다. 입수도 하지 않는다. 무조건 뺑뺑이다. '발이 땅에 닿지 않게'가 그의 모토다. 즉, 저 말은 쉬지 말라는 의미다. '오늘은 체력이 다할 때까지 한 영법으로 무한 반복'을 외치던 그였다. 수영 시작 후, 6개월 만에 5kg이 빠진 건 그의 방식이 부트 캠프 못지않았기에 가능했던 거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뺑뺑이에 익숙했던 나는 수영 선생님의 군대 방식이 꽤 맘에 들긴 했다. 선생님은 뜨겁지 않고 아주 차가웠다. 수업 중 뺑뺑이를 시작할 때면 '낙오자는 알아서 꺼져'라는 쌔한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그런 건지 40분쯤 되면 빼곡했던 수강생이 많이 사라진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중간에 나간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접영만 한 날인데, 중간에 수경이 벗겨져 잠깐 늦게 출발했다고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순간 욱해서 욕이 목젖을 통과해 혀끝까지 나올 뻔했지만, 다시 욕설을 삼키고 이딴 수업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작은 항의의 표현으로 수모를 벗어던지고 그대로 샤워실로 직행했었다.


어느 날은 설명 없이 무조건 20바퀴를 외치는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 물어보기도 했다.

"뺑뺑이를 하는 게 체력 증진에 가장 효과적인가요?"

"... 그런 안 좋은 말은 안 쓰려고 했는데, 맞는 말이에요."


나쁜 생각일 수 있겠지만 나는 그가 열정이 넘쳐 그런 식으로 수업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그가 그렇게 배워서 그런 식으로밖에 수업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가끔 락스 물에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드는 생각은 '저 사람, 사실 수영 선생하기 귀찮은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그의 냉정한 수업 스타일은 결론적으로 나에겐 굉장히 성의 없게 느껴졌다.


여튼 그가 간다니, 내 얼굴엔 환희와 새로 올 선생님에 대한 기대감이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다정한 사람이면 좋겠다. 기술적인 부분을 알려주면 좋겠다. 다이빙은 안 시켰으면 좋겠다.'등등 내 머릿속엔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불행 중 다행인지 새로 온 선생님은 온탕 같은 사람이다. 예전 선생님이 냉탕이었다면 지금 선생님은 너무 뜨거운 온탕이다. 친절해도 너무 친절하다. 자세 하나하나를 교정해 줘서 그런지 운동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느끼는 요즘이다.


사실 성인 수업은 동성 외에는, 특히 이성 간에는 자세 교정을 잘 진행하지는 않는다. 성희롱이나 성추행 같은 이슈가 있을까 봐 자제하는 거겠지 생각하지만. 솔직히 내 수영 스타일은 10대 때 만들어진 거라 내가 바른 자세로 수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속도엔 꽤 자신이 있지만 수영 스타일이 바르냐고 묻는다면 글쎄, 내 수영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여튼 새로 온 선생님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세 교정에 몰두해 있었고 광속 스피드를 즐기는 내겐 이 시간들이 고역이 됐다. 평소 4번에 한 번꼴로 숨을 쉬는 나인데 새 선생님은 지나가는 나를 무릎에 얹어놓고 제발 숨을 쉬라며 애원했다. ‘속도가 죽어서 자주 숨 쉬지 않는 편인데요'라고 대답하자 속도보다 자세가 중요하다며 숨을 쉬라고 말하는 그를 보니 답답하기까지 했다. 오래간만에 냉탕 선생이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자상한 선생님이 열정을 잃지 말고 끝까지 잘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턴하는 법도 다 잊은 나한테 턴을 알려줘야 하고, 숨을 참고 접영 하는 법을 잊은 나에게 그 방법도 알려줘야 한다. 냉탕과 달리 온탕 선생님에겐 인사도 꾸벅꾸벅 잘 한다. 오래간만에 수영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그래도 유들유들한 선생님이 참 많았는데, 지금은 성인반이라 없나 싶지만 온탕 선생님이 뿌듯해하도록 말을 잘 들어야지. 적어도 내가 네 번 본 그는 열정에 가득 찬 사람이니까, 그리고 열정맨들이 원래 쉽게 지치는 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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