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나마나

별거 아닌 별거 #일상의 기록

by 고로케


오늘은 완성된 글이 쓰고 싶지 않다. 마감을 앞둔 기획안을 짜는 느낌이다. 가끔은 그 느낌이 참 좋다. 마치 각 맞춘 테트리스처럼 블록을 쌓는 느낌, 고운 실을 예쁜 모양으로 땋는 느낌, 완성되면 하나의 깔끔한 그림이 나오는 느낌. 그런데 종종 작은 경험 속에서 큰 교훈이라도 이끌어 내어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강박증도 느낀다. 싫다, 싫어. 강제로 느껴야 하는, 혹은 쥐어짜서 만들어 내야 하는 교훈은 사양하겠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그냥 별거 아닌 별거를 기록하자 생각했다. 그래, 별거 아닌 별거지만 사실 매우 특별한 순간들이었음을 안다. 그래서 나는 초시대의 삶 속에서 '그' 순간을 기억하고 '그'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거 아니겠나.


#1. 여름밤

여름밤은 위험하다. 습하고 더운 공기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름밤은 늦게 시작된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에는 5시만 돼도 해가 지는 반면 여름에는 8시가 되어야 해가 저문다. 모든 게 느릿느릿한 여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름 저녁은 언제를 말하는지 헷갈리기만 하다. 해가 저문 저녁일까? 해가 뜬 저녁일까? 여름은 모든 게 기묘하다. 밤 늦게도 밖에서 아이들 웃음소리와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린다. 모든게 사라진 것 같은 고요한 겨울밤과 다르다. 소란스럽고 활기차다. 여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름밤이 만들어내는 그 특유의 미묘한 두근거림이 좋다. 머릿속에 맴도는 그 감정을, 뭐든 지 다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가슴 아래에서 용기가 솟아오른다. 송글송글한 땀이 맺혀 가로등 아래 비치우는 얼굴도 보기가 좋다. 모든 가능성이 열린 여름밤이 좋다.


#2. International love song

생일선물로 와인을 받았다. '와인? 나 술 안 마시는데?' 그래도 받은 거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병을 다 비웠다. 와인을 마시기 전에 치즈를 사야겠다 마음먹고 마트를 갔다. 돌아오는 길목, 귓가에 'international love song'이 울린다. 아, 이 노래는 겨울밤에 잘 어울리는 노래다. 여름과는 거리가 멀다. 코 끝이 아주 시린 겨울에 들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며 신호를 기다리는데 주황색 등이 켜진 피아노 학원이 눈에 띄었다. 무지개색 줄무늬 티를 입은 한 여성이 머리를 가지런히 묶고 열심히 피아노를 친다. 학생일까? 성인일까? 어떤 노래를 연주하는 걸까? 왜 피아노를 치는 걸까? 어떤 소리를 내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3. 성격

정우를 만났다. 정우는, 정말 친한 친구다. 신촌에서 상수역까지 걸으며 성격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정우는 내 성격 유형을 정확하게 맞췄다. 그 말로는 나와 그의 성격이 같은 유형이라 했고, 사실 그가 내린 진단이 너무 정확해서 반박할 생각조차 안 들었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고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 정우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 둘이 있으면 시원하게 가면을 벗어 버리고 감정 표현도 많이 한다. 감정이 넘쳐흐른다. 정우는 대체적으로 성격은 4-5세 때 형성되고 환경에 의해 사소한 요소는 바뀔 수 있겠지만 핵심 성격, 즉 강점과 약점은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16가지 유형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람 때문에 화가 났던 때가 생각났다. 이내 그 순간들은 '아,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 오케이' 이런 로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좋다, 감정이 정리되고 있다. 이제 실전 연습을 하면 된다.


#4. 고마움

회의 중이었다. 한 사람의 말이 나를 굉장히 부끄럽게 만들었다. 사람이 친절한 건지, 배려심이 있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건지, 착각을 한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고 지금도 모른다. 며칠 전 메일을 쓰려다 아웃룩을 꺼버리고 퇴근한 적이 있다. 가끔 메일을 쓸 때,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아예 메일함 자체를 닫아 버린다. 당시에도 그 사람이 낸 아이디어에 대해 '이건 그 사람의 생각입니다'라고 내가 대신 메일로 보고를 해 주는 게 맞나, 아니 이걸 내가 왜 보고를 해줘야 하나, 그리고 우리 둘의 아이디어를 제3자가 있는 곳에서 '이건 3자와는 관계 없고요. 우리 둘의 아이디어입니다'라고 생색내듯 말하는 게 맞나, 어떻게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컴퓨터를 꺼버린 거였다. 남이 한 것도 내가 했다고, 남의 아이디어도 내 아이디어라고 말하는 한심한 인간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그의 말 한마디는 아직 세상이 참 쓸만하다는, 많은 감정을 느끼게 했다.


#5. 행복 전도사

우연치 않게 행복 전도사가 됐다. 무쓸모임 이후 집에 돌아오면서 '너 정말 행복하냐'라고 물어봤다. 생각해보니 큰 행복이 아니라 항상 작은 것에 행복해했다. 큰 행복이 뭐지? 큰 행복이란 명사가 있나? 없다. 행복은 행복이다. 누군가 '행복하세요?' 물으면 5초 안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왜요?'라는 물음에는 '사지 멀쩡하고, 건강하고, 회사 잘 다니고, 아직까지 웃을 일 많고, 돌아갈 집이 있고, 대화할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고, 먹고 싶은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요, 그리고 지금 살아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하겠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럼, 매일 행복하세요?'라고 묻는다면 그건 다른 개념이다. 사람은 때론 죽고 싶을 때도 있고, 이렇게 힘든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근본적으로 태생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그게 사람이고 감정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계획한 것은 잘 이루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