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계에서 생각보다 많이 쓰는 말 중 하나는 편안(comfortable)이다. 이 업무를 하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지는지 내게 묻는다.
편안함은 소파에 앉거나 고양이를 안고 있을 때 느껴지지, 일할 때 느끼는 감정은 아니지 않나? 잘 적응이 되질 않았다. "불편해서 못하겠어."라고 말하는 것도 어색했다. 그래서 편안한지 물으면, "물론이지!!"라도 쾌활하게 대답하곤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하면, 정말 내가 편안한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대답을 한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고.
예문을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지도교수가 학생에게: 지금 하는 연구를 출판할 준비가 되었니? (내가 보긴 충분한 것 같은데 네가 보기엔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젠 출판하는 게 좋겠다)
(Do you feel comfortable with submitting the current version of manuscript?)
기자가 학자에게:이 (예민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Are you comfortable with talking about this (sensitive) subject?)
공저자끼리: 12월 말로 잠정적 데드라인을 정해도 부담이 없으시겠죠?
(Shall we tentatively aim for December for this work, if you guys feel comfortable to do so...?)
이런 이성적이고 격식 있는 질문을 할 때에 '편안함을' '느끼다'라는 감정적 표현을 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한국에서 일할 땐 불편이 당연했다. 나도 아프고, 동료도 아프고, 상사도 아프고, 다 아팠다. 모두가 고통스럽게 앞으로 노를 저어 가는데 내 손가락 아프다고 칭얼댈 수는 없었다. 내가 편안한지 아무도 묻지 않았고, 나도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미국 사람들에게 Feel comfortable~?은 나름대로 상대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다. "불편해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혹시 당신이 불편하다면 솔직히 이야기해주세요."와 같은.
또한 판단의 '주관성'을 인정한다. A에겐 불편한 일이 B에겐 편할 수도 있다. "내가 왠지 꺼려지는데." "그건 내 원칙에 반하는데." "그 날은 일정이 좀 많아 피곤할 것 같은데." 다 좋은 이유가 된다.
사실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도 없다. I am not sure if I would feel comfortable to do so. 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용수철처럼 "어이쿠! 그러시다면 염려마세요. 괜찮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화법이 데이비드 흄의 상대주의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이성의 감성에 대한 우위를 주장했던 칸트와 달리, 흄은 사람들이 두루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 곧 사회의 도덕이 되며 인간의 이성은 감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옳은지' 대신 '네가 편안한지'를 묻는 것이 흄 입장에선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미국의 법, 정치체계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례 기반적, 맥락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똑똑한 몇 사람이 '노오력'하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플라톤적 엘리트주의가 (없진 않겠지만,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희미하다. 개별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이 치열하게 논쟁하다보면 이렇게 저렇게 보다 나은 결론에 도달하겠지-라는, 조금은 느긋하고 답답하고 혼란스럽고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다.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맡은 바 임무를 열심히 해야지.'
'네가 승진하려면 더러운 것도 꾹 참아야지.'
'학생의 본분은 공부지.'
미국인들에긴 이런 의무론적 명제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듯 하다.
'인간은 제멋대로이고 누가 시킨다고 해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불편하게 만들면 반감만 살 뿐이다. 그러니 네가 유명해지고 싶고 성공하고 싶다면 이 기회를 알아서 놓치지 않겠지. 너와 나의 편안함의 레벨이 다를테니, 너의 편안함이 무엇인지 나에게 알려주길 바란다. 그렇게 맞춰나갈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안 되면 빠이빠이하는 거고!'
'편안한지'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내 감정이 온순한게 반응하는지보다, 내 양심에 부합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쓴 글이 학자로서 양심에 비추어볼 때 세상에 내놓을 퀄리티가 되었나. 내가 말하려는 이슈가 비록 논쟁적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말해야 하는 주제인가. 이렇게 나 개인이 나에게 셋팅해놓은 기준을 한 번 점검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하고 거절한다.
나는 이런 화법이 개인의 양심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드는 데에 기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본 바로는) 기업이든 정부든 학자에게 연구용역을 맡긴 경우, 발주자가 연구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드물다. 학자의 양심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라'는 식의 판결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압박하므로 위헌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런 시스템은 '너는 너, 나는 나' 사고에 기초하고 있기에, '빠이빠이'가 언제든 가능해야 돌아갈 수 있다. 상사 입장에서 이것 저것 다 불편하다고 하는 사람을 계속 데리고 있긴 어렵다. 회사와 좋은 핏이 아니라면 상사가 거침 없이 사람을 자른다.
어떻게든 후배를 잘 트레이닝해서 회사의 가치에 부합하는 인재로 만들려는 선배의 욕심에서 비롯하는 크고 작은 폭력도 "웬만하면 너는 내가 데리고 간다."라는 책임감에서 비롯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언제든 자를 수 있다면 구태여 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가면서까지 강요를 할 이유가 없다.
우리의 의무론적 공동체주의와 미국식의 주관적 상대주의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사회 전체로 볼 땐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미국이 답답할 때도 많다.
그래도 내 업무에 있어서만큼은, 나의 양심을 최대한 지켜가면서 일하고 싶기에 '편안한지'를 물어봐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미국에선 한국보다 세대 간 갈등이 덜 느껴진다. 싫은 건 때려 죽어도 안하는 정신이 오래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든 '난 이게 왠지 싫어요, 불편해요.'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의견이 환영받을 수 있다면. MZ 세대는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자기만 안다는 식의 비판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