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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리기의 기술

by 벨뷰의 정원


멍 때리기 만큼 차별적인 것도 없다. 할 줄 아는 사람은 한 없이 할 수 있고, 못하는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못한다고 한다.


왜 술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생각의 속도를 늦출 수 있어서"라고 곧잘 대답했다. 술을 마시면 상대방 말에 수긍하는 제스쳐를 취하면서도 멍을 때릴 수 있다.


영어에도 멍 때리기에 해당하는 말이 있는 걸 알고 놀랐다.

zone out이라고 한다.

"It involves temporarily becoming disengaged from the external world and lost in thought, which can make a person appear vacant or unresponsive."

이런 뜻이라고 Gemini가 알려주는데, 한국의 멍 때리기와 정말 유사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만 멍을 때리라는 법도 없겠지.


난 멍 때리는 시간을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친구가 약속에 늦어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

앗싸. 멍 때리는 시간 확보다! 이런 느낌이다.

물론 계속 반복된다면 언젠가는 화가 나겠지만.



우리 남편은 멍을 못 때리는 사람이다. 그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같이 살아보기 전에는 몰랐다. 나는 창밖을 보며 두뇌를 비우는 시간 동안 남편은 불안해하면서 인스타그램 릴즈나 유튜브 릴즈를 스크롤한다. 본인도 보기 싫은 영상을 계속 본다고 한다. 멍이 없다는 건 여백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명상에 깊이 감화되지 않는 이유는 멍이 명상과 비슷한 편안함을 주어서일까. 명상은 흩어지는 생각의 끈을 꼼꼼하게 잡아두는 느낌이고, 멍은 흩어지는 생각을 미련 없이 놓아버리는 느낌인데. 그 둘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우리 아기가 8개월이 되었을 때쯤 멍 때리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두뇌의 찌꺼기가 청소되는 이 신선한 기분을 아기가 계속 맛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멍 때리기는 남편 말에 따르면 태생적인 능력이라 기술이란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도 '자, 지금부터 멍을 때려보자' 하고 멍에 돌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치만 자칭 멍 때리기의 고수이자 멍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굳이 몇 가지 기술을 생각해본다면,


1. 자연을 바라본다. 자연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복잡하고 멀리서보면 단순해서 그 원근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샌가 멍의 세계로 빠진다.

2. 책을 읽는다. 책을 보면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나 내 유년시절의 기억이 소환될 때가 있다. 활자와 내 머릿 속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보면 어느 새 살짝 졸린듯 멍의 세계로 들어선다.

3. 술을 마신다. 나 같은 경우는 술이 멍의 횟수를 늘려주는데, 모든 사람이 그런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술을 많이 마시면 상대방의 말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기가 쉬워진다. 그럴 때의 해법은 상대방에게도 술을 많이 먹이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오랜만에 한국에 도착해 아사히 쇼쿠사이 라는 신기한 맥주를 한 잔 하고 혼자 기분 좋게 멍을 때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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