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크레인도 한국과 같이 분단국가가 될것이다.
“한국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중공군은 북쪽으로 철수해야 한다. 인공은 무장해제해야 한다. 소련과 중공은 인공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 유엔의 보증 하에 모든 협상에 한국이 반드시 참석해야 하고 한국의 통치권과 영토를 침해하는 합의는 있을 수 없음을 확인해야 한다.” – 1951년 6월30일 이승만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주선으로 유크레인 전쟁 휴전에 대한 협상이 한창이다. 유크레인 대통령 볼로디미어 젤렌스키는 유크레인-러시아 전쟁 휴전의 조건으로 현재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유크레인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심지어 2014년 러시아가 점령한 크리미아 반도 까지도 유크레인이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크레인이 잃은 영토를 되찾기는 불가능하다. 유크레인이 전쟁으로 러시아를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쟁의 결과는 크리미아를 포함한 유크레인 동부 러시아 점령지역을 포기하고 나머지 영토를 가진 유크레인의 안보를 보장받는 것이 최선책이다. 젤렌스키를 포함한 유크레인 지도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여론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만약 젤랜스키가 크리미아를 포기한다고 선언하면 유크레인 사람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라고 외신은 보도하고 있다.
휴전을 위한 협상이 활발해질수록 러시아의 유크레인 영토 내부 시민들에 대한 폭격이 강화되고 있다. 러시아가 유크레인 시민들을 못살게 굴면 여론이 조속한 휴전 쪽으로 반전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트럼프도 겉으로는 무차별 폭격하는 푸틴을 비난하지만 여론의 반전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니고 휴전으로 승자 없이 일단락되었듯이 유크레인 전쟁도 전투는 하지 않지만 전쟁은 기한 없이 계속되는 휴전으로 끝날 것이다. 한국 전쟁이 그랬듯이 유크레인 전쟁도 애초부터 승자와 패자를 가릴 수 없는 전쟁이었다. 둘 다 대리 전쟁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휴전 과정을 반추해 보면 유크레인전쟁의 귀추를 대강 가름할 수 있다.
한반도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4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듯이 유크레인은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 끼어 있다. 유크레인 전쟁의 원인은 유크레인에 친 서방 정권이 들어서고 나토가입을 추진한대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토가 러시아를 포위하는 형국을 러시아의 푸틴은 좌시하지 않고 유크레인을 침공하여 유크레인과 러시아 사이에 친 러시아 위성국가를 만들어 국경을 안정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또한 강대국의 완충지대이다. 북한은 중국과 미국사이의 완충지대이고 남한은 태평양 세력인 일본과 미국 사이에 있는 중국과의 완충지대이다. 만약 남북통일이 되면 한반도의 강대국을 위한 완충지대 역할은 끝난다. 그래서 한반도 주위의 4대 강국은 한반도의 분단을 선호한다.
1950년6월25일 새벽 인민군은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한국전쟁의 시작이었다. 국군은 전쟁 발발 사흘만에 붕괴되었다. 한국은 사실상 국가를 방위할 군대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후 전쟁은 미군이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며칠만에 미군과 인민군의 전쟁이 되었다.
8월부터 미군은 낙동강 전선 방어에 전력투구하여 9월15일 인민군을 격퇴했다. 이후 인민군은 전쟁초기 국군처럼 오합지졸이 되었다. 체계적인 작전을 할 수 없는 군대였다. 인천 상륙에 성공하고 서울을 수복한 미군은 10월1일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나라를 방어할 군대를 상실한 인공은 북진하는 미군에 대해서 속수 무책이었다. 인공은 며칠만에 평양을 내주었다. 이 때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인공에 들어왔다. 전쟁은 미군이 한국을 중공군이 인공을 대신해서 수행하는 대리전쟁이 되었다. 다만 당시의 중공은 소련의 원조에 의지하는 나라였고 중공군 뒤에는 소련이 있었다.
미군은 중공군의 개입에 전혀 준비가 없었다. 미군은 그들의 전술에 대한 사전 정보를 무시했고 전투력을 크게 얕잡아 보았다. 미군은 급하게 패퇴하여 1951년 1월4일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 주었다. 산악 전투에 익숙한 중공군을 미군에게 유리한 평지로 유인하기 위해서 34도선까지 작전상 후퇴한 미군은 전선을 재 정비하여 1951년3월에 서울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대강 38도선 영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장병들이 1950년 크리스 마스 때까지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구상에서 인공이라는 나라를 사라지게하고 귀국하기를 기대했던 미국 국민들 사이에는 반전여론이 비등했다. 이억만리 북한의 혹한에 시달리며 악전 고투하는 장병들에 대한 보도가 한몫 했다.
한편 중공군은 극심한 보급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현지 조달을 예상하고 파병된 중공군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전투를 해야 했다. 탄약과 무기공급도 무척 부족했다.
38도선 부근에서의 전투는 치열하게 계속되었지만 미군과 중공군은 상대를 멸망시키는 것이 전쟁의 목표가 아니고 종래의 영토회복에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거의 1년만인 1951년6월23일, 소련유엔대사 에코프 말릭은 한국전쟁 종식을 제안했다. 6월30일 한국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회담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38도선 영토회복에 만족하지 않고 멸공통일을 주장하며 근본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의 전쟁종식에 반대했다. 북진통일을 염원하는 국민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사국인 한국과 인공을 무시한체 전쟁을 도 맡아 했던 대리국의 국내외 사정으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2년여 휴전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중공군과 미군(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은 38도선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아무런 득실 없는 협상을 자기 편에 유리하게 이끌려는 힘자랑에 불과했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국토는 점점 피폐해져 갔다. 승자와 패자를 가를 수 없으니 종전은 불가능했다. 협상시작한지 2년만에 스탈린이 사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전이 성사되었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았다. 중공대표, 유엔군 대표, 인공 대표가 휴전협정에 사인했다. 남한이 사인하지 않았지만 휴전협정은 유효했다. 아무리 대한민국 헌법이 인공이 존재하는 북한 지역을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해도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젤렌스키가 목이 쇠도록 러시아 점령지역을 유크레인 영토라고 외쳐도 유크레인 현재 영토에 살고 있는 국민의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승만과 젤렌스키의 정치적인 이해타산이 국민에 끼치는 폐는 지대하다.
대중이 우매한지 정치가가 영악한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무자비한 국제관계를 타계할 위인은 현명한 지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