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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스탈린은 서로 다른목적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스탈린은 한국전쟁 휴전을 원하지 않았다.

by 온기철 James Ohn


how-photos-became-a-weapon-in-stalins-great-purges-featured-photo?_a=BAVAZGDX0 Joseph Stalin

망한 조선의 주인 일본이 나갔다. 대신에 38선 이북은 소련이 차지하고 이남은 미국이 주인이 되었다. 민족의 지도자들은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것을 막기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북에는 친소 공산주의 국가가 남에는 친미 자본주의 국가가 세워졌다. 2차대전 이후 세상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이분되었다. 한반도는 이 두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열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공의 대권을 차지한 김일성과 한국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려고 각각 종주국 소련과 미국에게 군사원조를 요구하고 침략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제압한 소련은 거의 동시에 북한을 점령했다. 그리고 미리 계획했던 대로 공산주의 국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공)을 세운다. 말하자면 계획경제를 기반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친일파는 물론 지주와 자본가, 종교인 등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단시간내에 사회질서가 확립되었고 평민들의 생활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그리고 1년여 만에 소련의 적극적인 원조로 강력한 인민군이 만들어졌다.


반면에 미국은 남한의 전략적인 가치에 대한 확신 없이 그저 서울을 소련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서 라는 막연한 전략으로 남한에 들어왔다. 북에서 소련이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민족 수권 조직을 인정하고 이를 십분 활용하여 정책을 수행했던 반면에 남한의 미군정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해방 후 국민이 절실하게 원했던 친일파 청산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을 했다. 불 난 집에 부채질하듯 미국정부는 한국 미군정에 대한 원조를 등한시했다. 일본 재건에 막대한 정부예산이 소요되었기 때문이었다. 남한 국민들의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경제는 억 망이었다. 사회적 혼란 또한 겉잡을 수 없었다. 이승만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는 겨우 경찰 경비대를 무장할 수 있는 선에서 그쳤다. 이승만의 북진통일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2차대전 후 스탈린은 유럽의 공산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방해로 스탈린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켜 미국이 개입하게 하여 유럽에서의 미국의 공산주의 학산 저지 전략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아직 핵무기가 없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집요한 남침 요구를 거절하며 때를 기다렸다. 1949년8월29일 소련은 카자흐스탄 사막에서 드디어 핵실험에 성공하여 세계 제2의 핵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중공의 한국전 개입을 조건으로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했다.


한편 남한의 미군은 1949년9월15일부터 남한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건국한지 한달, 소련이 원폭 실험에 성공한지 16일 만이었다. 1949년 6월29일 미군은 500명의 군사 고문단 만 남긴 체 남한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전쟁 방지의 필수 조건인 힘의 균형은 완벽하게 깨졌다. 김일성에게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게 할만한 정황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의 전쟁 목적과 김일성의 그것은 전혀 달랐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게 하여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김일성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이 목적이었다.


소련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일부러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미국을 대표로 하는 유엔군의 참전을 용이하게 했다.


막강한 공군력과 해군력을 가지고 있는 미군참전을 원했던 스탈린은 인민군에게 해군과 공군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미군은 하늘과 바다를 장악하고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인민군이 불리하게 되자 스탈린은 중공군을 투입하여 미군이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하게 했다.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했으나 중공군에게 패퇴하여 1951년 1 월 4일 서울을 내주고 36도선으로 후퇴했다. 3월에 다시 서울을 회복하고 38도선 전쟁 전의 영토로 진격한 후 휴전회담을 시작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전쟁을 끝내려 하지 않았다. 미국이 계속해서 중공군과 싸우기를 원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중공군과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은 영토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전투만 2년여 동안 계속하여 수많은 인명이 회생되었다. 결국 스탈린이 1953년 3월5일 사망한 후인 1953년 7월 27일에야 휴전이 이루어졌다.


세상의 전쟁은 독재자의 망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독재자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전쟁을 찾아서 한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 나타나유의 가자 지구 공격과 이란 공격등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은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고 수많은 젊은이들의 생명을 앗아간다. 얼마전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령 선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북한을 도발하려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의 폐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어리석은 지도자의 망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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