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하루 한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복 Feb 27. 2023

글쓰기를 다짐하다


글을 쓰기로 했다. 다짐한 그날, 무작정 집 근처 카페에 나와 앉았다. 햇살이 좋은 오후였지만, 먼지가 뿌연 하늘은 청명하지 않았다. 가무잡잡한 마음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어째서 집에서 나와야만 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집은 고요하다. 홀로 보내는 한낮의 집은 따뜻하고 안전하고 게다가 다정하기까지 하다. 곁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는 다복이의 동그란 등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글을 쓰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그런데도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 곧장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집에서 나는 일을 하기도 하고 쉬기도 하고 취미생활을 하기도 한다. 나에게 집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지만,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프리워커가 된 이후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집은 복합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해학적인 공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을 뜻할까.


글은 내게 여행과 같다. 과거를 헤집고 다녀야 하는 지난한 시간을 비롯해서 아득한 미래를 꼬집어 눈앞에 펼쳐 놓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 그 여행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것, 그리고 온전히 하얀 지면 위의 깜박이는 커서 앞에서 진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거창하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다. 두 가지 필요 요소 덕분에 쓰기의 습이 잡히지 않은 내겐 일상 너머의 공간이 필요했다.


작업실을 가졌을 때에는 가장 빛나는 창의력과 신나는 호기심으로 무언가를 늘 끄적였던 것 같다. 그곳에서 나는 무용하고 무가치한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작업실의 생명은 오래 버틸 수 없었고, 현실적인 벽은 나를 기다려주지 못했다.


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온 나의 사명 같은 것이다. 어느 인생에나 이렇다 할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 모든 이야기는 고유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의 생로병사에 있어 각자의 고유함은 맥락적 측면에서 각각 연결되어 있다. 쉽게 말해 누구도 죽음과 상실과 슬픔과 분노와 기쁨과 행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내 삶은 아주 어린 날부터 이별과 상실의 연속이었다. 그 경험은 여러 퇴적층을 이루어 층고를 높여 왔는데, 어느 날 엄마의 죽음을 겪고서 모든 것이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각자 맞이하는 방식과 경험의 둘레는 다를 수 있지만, 비슷한 너비 안에서 경험하는 감정의 카테고리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가장 외로웠던 청소년기에 나는 나처럼 외로운 청소년들을 위해 몸을 굽힐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생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 희망을 수집하던 삼십 대 초반에는 고독한 이들의 따뜻한 벗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누군가는 도전하고 쟁취하여 얻어내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우회하여 다른 방식으로 꿈의 파노라마를 보기도 한다. 나는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비루한 나의 글을 생각해 낸 것뿐이다.


글자를 쓸 수 있는 때부터,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늘 무언가를 끄적였다. 대게는 말도 안 되는 나의 상상 속의 이야기 이거나, 그때 그때의 내 감정을 쏟아내는 낙서 같은 일기였다. 스무 살을 넘기고 여전히 내가 나로 살아갈 여력을 잃지 않았던 때에는 글솜씨가 있다는 평을 들었고 스스로도 내 글에 만족했다. 하지만 생존만이 남은 삶에는 생명을 말하는 글쓰기가 어려운 법이다. 내 글은 어느새 예전에 스스로 흡족하던 그 문체를 잃었다. 부끄럽고 아른한 그리움으로 어느 날부터 글을 쓴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인간은 해가 지면 몸을 뉘일 집을 찾아가기 마련이고, 날이 밝으면 다시 그 집에서 자신을 정비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내게 글은 내 자아의 ‘집‘이었으므로 여전히 쓰는 역동 안에 다시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연어의 회귀본능과 같았다. 이제는 그 회귀를 온전한 마음과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색이 바래버린 지금의 내 문장들에서 시작해 볼까 한다. 매일, 가급적 매일, 나는 쓰는 자아를 카페인으로 달래며 무거운 걸음을 옮길 거다. 이 걸음이 어딘가에 발자국을 남길지 모르겠지만, 내가 써 내려가는 길 위에서 작은 눈물과 위로와 희망이 피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연스러움이 주는 자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