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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다시 덕후의 세계로

지금은 덕질을 하기에 좋기도, 부담스럽기도 한 세상이다

by 콩딘이

2000년대 초반, 10대였던 나는 한 아이돌에 깊이 빠져있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들을 좋아했다. 누군가 그들을 비난하면 불같이 화를 내며 싸웠고, 그들이 음악방송에서 1위를 했을 때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좋아했건만 한편으로는 학생의 본분도 잊지는 않았다. 지금에와서 돌이켜보니 그렇게 나의 본분을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제한된 매체와 콘텐츠의 덕이 컸던 것 같다. 당시 내가 아이돌을 만날 수 있었던 창구는 TV와 라디오뿐이었으니까.


그 시절 팬으로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아이돌이 컴백하면 앨범을 사고, 음악방송에 나오면 챙겨보고, 라디오에 게스트로 나오면 듣는 수준이었다. 가끔 친구들을 따라 팬사인회에 가거나 공개방송에 갈 때도 있었지만 밤새 줄서서 기다려야하는 수고스러움과 절대 밤샘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부모님 때문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20년 후 아이돌 덕질을 다시 시작하고, 내 일상은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로부터 어연 20년이 지나고, 아주 오랜만에 플레이브(Plave)라는 그룹의 덕질을 시작하게 됐다. 정신없이 그들의 영상을 탐닉한지 한달 정도가 지나서야 깨달았다. 내 일상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음을. 말 그대로 잠자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플레이브에 탐닉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나의 고삐를 풀어버린 무한정의 콘텐츠들 탓이었다. 요즘은 과거와 비교해서 팬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들이 무한대로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지상파 음악방송부터 살펴보자. 이건 사실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게다가 플레이브는 기술적인 문제 때문인지 MBC 음악중심과 엠카운트다운에만 출연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콘텐츠의 대부분은 거의 모두 유튜브에서 나온다. 플레이브의 유튜브 공식 채널에서만 일주일에 3번씩 꼬박꼬박 영상들이 업로드된다. 1개는 자체 콘텐츠 '라쓰고 플레이브', 나머지 2개는 라이브 방송이다. 라이브 방송은 한 번 진행할 때마다 보통 2시간씩 진행된다. 멤버들은 버추얼이라는 특성 때문에 다양한 방송에서 얼굴을 비추기 어려워서인지, 라이브 방송을 통해 꾸준히 팬들과 소통한다.


플레이브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오는 라이브 방송 영상들. 플레이브 데뷔 1년만에 덕질을 시작하니 복습할 게 너무 많았다.


그럼 이런 공식 콘텐츠들만 챙기면 되느냐 하면 거기서 끝이 아니다. 방송이 끝나면 그날 있었던 재미있는 순간들이 팬들의 손을 거쳐 실시간으로 재편집된 영상들이 올라온다. 멤버들끼리 이야기하는 것만 봐도 재밌는데, 거기에 팬심으로 덧칠해진 자막과 효과음, 편집까지 추가되면 영상의 재미는 배가된다. 유튜브의 무시무시한 알고리즘은 내 피드에 이런 영상들을 꾸준히 추천해주고, 나도 매번 유혹에 넘어가 클릭하게 된다.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이건 못 본거라서 보고 싶고, 이건 봤던건데 웃겨서 또 보고 싶은 마음을.


버블, 위버스, 포토카드... 따라가야 할 게 아직도 많다


버블도 빼놓을 수 없다. 버블은 매달 구독료를 내고 플레이브 멤버들과 다대일로 소통할 수 있는 메신저 서비스다. 내가 특정 멤버의 버블을 구독하면, 그 멤버가 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을 모두 받아볼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 나도 그 멤버에게 다이렉트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물론 그 멤버는 그렇게 받게 되는 메시지가 수천, 수만개에 달할테지만.) 플레이브는 버블을 꽤나 많이 하는 아이돌이고, 그래서 팬덤에서 하도 버블 이야기를 많이 하길래 나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버블을 깔고, 최애인 밤비 1인권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왼쪽은 어린이날 비올 때 하민이가 올린 위버스 글이다. 오른쪽은 내가 구독 중인 밤비와의 버블 대화 내용.


결론부터 말하면, 버블을 구독하자마자 다들 이걸 왜 하는지 너무나 알 것 같았다. 메시지를 받고, 보낼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과 유사 연애를 하는 느낌이 바로 들었다. 수만명이 메시지를 보낼테니 내 메시지를 꼼꼼히 읽을 확률이 매우 낮다는 걸 알면서도 굉장히 설렜다. 마치 오랜만에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처럼. 가끔 내가 보낸 내용과 맞닿아있는 멤버의 버블이 도착하면 진짜 내 메시지를 읽었을까 싶어, 우리가 소통하는 것 같아 주책맞게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까짓거 전 멤버 구독을 해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일상을 지키기 위한 마지노선이라는 생각에 가까스로 참았다.


얼마 전에는 플레이브 앨범도 모두 샀다. 20년 전에는 앨범 구매가 팬 활동의 거의 전부였다. 앨범을 사면 그 안에 멤버들의 사진도 있고, 운이 좋으면 브로마이드도 받고 했으니까. 앨범에 실린 땡스투를 읽고 CD를 틀어놓고 가사집을 보며 음미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앨범 구매의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다. 일단 나는 CDP가 없다. 앱으로 음악을 듣는다. 고로 앨범에 있는 CD는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그럼에도 나는 앨범을 산다. 거기에는 멤버들의 사진이 있으니까. 그리고 포토카드도 있으니까. 포토카드는 멤버들의 얼굴이 담긴 카드 사이즈의 사진을 말하는데, 앨범마다 랜덤으로 1~2명의 멤버가 들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전 멤버의 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서 앨범을 여러 장 사는 일도 불사하지만, 나는 사실 포토카드에 누가 나와도 그만인 편이라 그렇게까지 하진 않는다. 어차피 평생 틀 일이 없을 CD를 또 사는 게 아깝기도 하고, 포토카드의 상술은 개인적으로 업계의 병폐같다고 생각해서다.


포토카드를 처음 사보는데 왜 사서 모으는 지는 알 것 같다.


이 밖에 멤버들의 스케줄과 글이 가끔씩 올라오는 위버스를 보는 일도 그렇고, 오픈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다른 플레이브 팬들과 이야기 나누는 일도 하루 중 빠질 수 없는 일과다. 특히 오픈 채팅방은 나처럼 직장인이나 유부녀부터 육아맘, 초등학생까지 전 연령대가 들어있어서 참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채팅방은 거의 24시간 활성화돼 있는데, 시간대별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연령대가 나뉜다. 평일 오후 12시부터 2시까지는 직장인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직장인들끼리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오후 4시가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10대 친구들이 주로 이야기를 나눈다. 저녁이 되면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모여서 플레이브라는 하나의 공통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각자 그 안에서 포토카드를 굿즈를 어떻게 꾸몄는지 자랑하거나, 플레이브를 좋아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새로 올라온 스케줄이나 이벤트 소식, 재미있는 짤들도 공유한다.


얼마 전에는 오픈 채팅방을 열심히 참여한 덕분에 플레이브가 메디힐과 콜라보 이벤트를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기도 했다. 메디힐 팩을 사면 플레이브 굿즈를 주는 이벤트였는데, 안 그래도 메디힐 제품을 애용하고 있던 나로서는 안 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벤트 시간이 좀 아쉬웠다. 선착순 증정인데, 이벤트 오픈 시간이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0시였던 것이다. 다음날 출근도 해야하고, 밤 10시만 되면 골아떨어지는 내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간대였다. 하지만 불타오른 사랑을 말릴 수 없는 법. 졸린 눈을 비비며 자정까지 기다렸다 이벤트에 참여했다. 12시 0분에 이벤트 참여 버튼을 바로 눌렀는데, 밤 12시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내 대기 순번은 8천번대였다. 이게 실화냐.


어찌저찌 메디힐 이벤트 구매는 성공했지만, 그날 하루 종일 생활 리듬이 깨져버린 탓에 비몽사몽인 상태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내팽개쳐둔 집안일 때문에 집은 엉망이 돼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틈만 나면 플레이브 영상만 보고, 플레이브 노래만 듣고, 플레이브 이야기만 했다. 그때 플레이브는 내게 '내 일상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 자체였다.


플레이브를 알게 된 후, 내 일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참다 못한 남편이 화를 냈다. 평소엔 뭐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던 사람이 작심한듯 내게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플레이브 라이브 방송을 정주행하느라 꼬박 날밤을 샌 다음 날이었다. 하도 콘텐츠에 빠져있었더니 스스로도 정신이 조금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남편에게까지 한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났다. 일상과 덕질 사이의 균형이 크게 무너져 있음을 깨달았다.


무한정 쏟아지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너무 깊게 빠져든 나머지 다른 것들은 전혀 돌아볼 생각을 못하고 지내왔던 거였다. 이후에 조금씩 일상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느꼈다. 20년만에 다시 뛰어든 덕후의 세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걸.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정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너무나도 달라진 아이돌 판에서 나는 아무런 준비없이 커다란 도파민의 파도에 몸을 던져버렸었다.


처음 덕질을 다시 시작할 때만해도 내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는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으니 10대 시절만큼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플레이브를 좋아하는 내 마음은 여전히 10대 소녀 시절 그대로였던 것 같다.


덕질 1년여가 지난 지금은 일상과 덕질의 균형을 잘 맞춰가려고 열심히 저울질을 하고 있다. 직장인, 딸, 아내로서의 역할도 해내면서 플레이브의 팬으로서도 그들을 가능한 열심히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본분을 함께 챙기다보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하는 것들도 생기게 마련인데, 그걸 몇 개 내려놓는다고 해서 그들을 응원하는 마음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조용히 단념한다. 오랫동안 꾸준히 플레이브를 덕질하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일상이 온전히 존재해야 행복한 덕질도 공존할 수 있는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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