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브를 좋아하면서 서브컬처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로 했다
플레이브를 좋아하면서 깨달은 명제가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절대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것.
일전에 회사 동료들에게 퇴근길 지하철에서 플레이브 영상을 본다고 했더니 놀랍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특히 그중 한 사람은 만원 지하철에서는 절대 유튜브 쇼츠 같은 영상은 물론, 소설도 잘 안 읽는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뭘 보는지 들키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나는 오히려 그 동료의 고백을 듣고 놀랐다. 내 기준에 그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공공장소에서 숨기기는커녕 더 노골적으로 플레이브 영상을 보는 사람에 가깝다. 피곤한 퇴근길에 도파민을 안겨주는 유일한 삶의 낙을 굳이 숨겨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고, 그 짧은 통근길에서 플레이브를 몰랐던 사람들이 나를 통해 우연히 그들을 접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팬으로서 기분 좋은 일일테니 말이다.
그래도 동료들이 매우 놀라는 걸 보니까 내가 너무 주변 눈치를 안 보는 건지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긴 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버추얼 아이돌 영상을 보면서 히죽거리는 30대 여성에 대해 말이다. 플레이브를 몰랐던 과거로 돌아가 내가 그 여성을 마주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기보다 어린 아이돌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나잇값을 못한다고 여겼을까. 아니면 애니메이션에 빠진 오타쿠라고 비웃었을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시의 나는 둘 다였을 수도 있다. 플레이브를 좋아하기 전의 나는 서브 컬처에 편견을 많이 갖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남편을 오타쿠라고 폄하했으며, 무명 배우를 좋아하는 친구를 보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고, 오컬트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는 어딘가 마음에 결핍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서브 컬처를 열린 마음으로 보려 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편견과 잣대를 들이대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런데 플레이브를 좋아하면서 이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서브 컬처에 대해 좀 더 관대한 마음을 갖기로 했다.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있는 플레이브에 빠지면서 마이너에 대해 내가 너무 무지했고 거만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서브 컬처가 대중들의 편견을 타파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꾸준히 응원하고 지키고 싶어 하는 그 마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입덕부정기를 거치고, 공식 팬클럽에 가입한 후부터는 플레이브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마음이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일상을 살아가는 큰 원동력이 된다.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뇌는 훨씬 더 활성화되고 사고도 유연해진다질 않은가. 거기다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버리니까 현대인의 고질병인 우울증을 줄여주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결국은 나를 구하고, 세상을 구할 거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플레이브의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입덕한 지 겨우 1년밖에 안 됐는데 그 사이에 플레이브는 정말로 초고속 성장을 했다. 이제는 '버추얼 아이돌 최초'가 아닌 '아이돌 최초'의 수식어로 더 많이 불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원히트원더나 밈으로 반짝 인기를 끌었다가 사그라드는 어느 아이돌 그룹들과 다르게 꾸준히 커리어하이를 갱신하며 팬덤을 공고히 해나가고 있다. 이제 서브 컬처가 아닌 주류 문화로 우뚝 서고 있기 때문에 팬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여기저기 자랑할 수밖에 없다.
물론 악플과 편견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상파 음악방송 1위에 멜론 TOP100 1위를 해도 이놈의 편견이라는 건 계속 존재한다. 편견이라는 단어 그 자체에서 갇혀 새로운 변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서 느끼는 낯선 불안함 때문에 무시와 혐오의 시선을 던지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해한다. 나 역시도 플레이브를 처음 접했을 때는 어떻게 A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냐며 세상이 말세라고 했던 사람이니까 말이다. (버추얼이라는 개념을 전혀 몰랐던 시절이었고, 반성한다. 지금은 누구보다 인간적인 플레이브 멤버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사람들을 생각하며 열을 내기보다는, 그때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 플레이브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면 어쩔 뻔했을까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들이 지금 내 삶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그들의 음악과 무대에 얼마나 많은 생기와 위안을 얻는지 떠올려보면 심심하다 못해 건조한 삶이 떠올라서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래서 앞으로도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당당하고 자신 있게 플레이브를 좋아해 보려 한다. 얼마 전에는 컴백 라이브 방송을 보고 깔깔 거리는 나를 보고 남편이 '플레이브는 당신보다도 훨씬 나이가 어릴 텐데 당신이 이렇게 좋아하는 걸 알면 쟤네가 어떻게 생각하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냥 무심히 대꾸해 줬다. 뭘 어쩌겠어, 좋아하고 고마워해주겠지.
"사랑을 하고 계신다면,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주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작년 말 이영지와 플레이브의 합동 무대에서 이영지가 던진 말이다. 이걸 본 나를 비롯한 수많은 플레이브 팬들은 비슷한 뭉클함을 느꼈을 것이다. 고난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영역을 구축한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자부심과 연대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플레이브와 팬들은 편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극복했던 서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더 끈끈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결국은 사랑이 모든 것을 이겨내는 그 서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