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zero Apr 15. 2024

비싼 입맛

    오늘도 먹고사는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나는 미각이 예민한 미식가가 아니며, 맛집 지도를 들고 유명한 식당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아니다. 식사량이 많지는 않지만 편식 없이 잘 먹는 사람, 주는 대로 받아먹는 무난한 입맛의 소유자.(혹자는 이런 나를 저렴한 입맛이라 했지만, 나는 무난한 입맛이라 말하고 싶다.) 그러니 어린 시절부터 반찬 타령을 해 본 적이 없고, 학교 급식이 안 맞아서 도시락을 따로 준비한 적도 없다. 물론 여행지에 가서는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어보려고 노력한다. 제철 과일이나 나물처럼 계절음식도 좋아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크게 특이점이 없는 입맛이기에 일본 살이도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몇 번의 일본 여행을 통해서 나는 현지 음식을 매우 맛있게 먹은 기억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4박 5일의 여행과 열두 달의 해외 살이는 달라도 한 참 다르다는 거였다.  처음 일‧이주일은 괜찮았다. 조리도구가 없어서 주로 밥을 사 먹었는데, 갓 튀겨낸 튀김이 좋고 곱창과 부추가 곁들여진 모츠나베도 맛있었다. 걸쭉한 고기국물이 들어간 라멘도 한 끼로 제격이었다. 편의점 도시락의 양과 질은 훌륭해서 굳이 식당을 안 가고 도시락만 사 먹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생맥주! 하루에 한 번은 꼭 “나마비루 구다사이(生ビールください)”를 말하게 되는 마성의 맛. 이토록 부드럽고 시원하면서 청량한 맛이 있다니!! 꼬치와 연근튀김, 가라아게(닭튀김)와 함께 마시면 하루의 피곤함이 맥주거품처럼 녹아버렸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맛있다고 생각한 음식도 이 주가 넘어가니 힘들어졌다. 파는 음식은 왜 이렇게 달고 짜단 말이냐. 밑반찬도 없이 한 그릇 음식만 먹도 것도 고역이었다. 장점이 단점으로 바뀌자 튀김을 먹으면서 김치 생각, 모츠나베를 먹으면서는 시금치나물 생각. 라멘을 먹으면서 파김치 생각, 심지어 가라아게 위에 한국 프랜차이즈 치킨집의 양념소스를 듬뿍 뿌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때마침 주방제품과 조리도구가 도착해서 집밥을 해 먹기 시작했다. 삼삼하고 싱거운 음식을 먹을 수 있겠구나. 익숙한 입맛의 세계로 나는 돌아왔다.     


    얼마 전 매콤한 게 땡겨서 김치찌개를 끓였다. 자화자찬을 하자면 나는 김치찜을 잘하는 편인데, 김치찜의 관건은 알맞게 익은 묵은지와 돼지고기 양념, 숙성이다. 하지만 이곳에 묵은지가 없으니 김치찜은 패스. 김치찌개로 난이도를 낮췄으나 김치가 복병이었다.

    현재 김치는 한국에서 가져온 비비고 포장 배추김치가 전부이다. 그마저도 조금씩 나눠서 야금야금 먹고 있다. 예전 같으면 아낌없이 사용했을 그 포장김치가 너무 아쉬워서 김치찌개에 차마 넣을 수가 없었다.(난 아직 김치 담그기까지 할 자신이 없다.)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역시나 한국에서 가져온 종갓집 포장파김치! 파김치로 김치찌개를 끓여본 적 없지만, 어쩔 수 없다. 매콤한 찌개는 먹고 싶고, 배추김치는 아까워서 찌개에 못 넣겠고. 슈퍼에서 돼지고기를 사 와서 양념을 하고, 파김치 종종 썰어서 김치찌개를 끓였다. 두부도 넣고.


    보글보글, 찌개가 끓는다. 냄새는 어찌 괜찮은 것 같은데… 맛이 궁금하다. 

    음, 매콤한 건 맞는데… 김치찌개 비슷한 것도 맞는데. 이게 참, 뭐라 말해야 할지… 맛이 묘하네, 묘해.

   

    며칠 뒤, 슈퍼에서 한국 식재료 코너를 발견했다. 쌈장과 초장을 부르짖는 남편에게 사진 찍어 전송하고, 쌈장 하나를 사들고 왔다. 포장 배추김치를 판매하는 것도 봐 두었다. 가격이 사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김치찜, 김치찌개 먹고 싶은 날은 외식하는 기분으로 포장김치를 사 와서 듬뿍듬뿍 넣어 만들어 먹을 테다. 칼칼해지게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도 넣어서. 

    근데 포장김치 가격을 생각하니 내 입맛은 무난한 입맛, 저렴한 입맛이 아니라 고급입맛, 비싼 입맛, 미식가의 혀가 되어 버렸다. 의도치 않게 고급입맛이 되어 버린 상황.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김치라는 걸 후쿠오카에 와서 인정하게 됐다는 아이러니.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보수적인 미각의 위대함. 그러니까 K푸드 만세다!

매거진의 이전글 벚꽃으로 만든 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