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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zero Apr 09. 2024

벚꽃으로 만든 성


    바야흐로 3월, 봄이 되었다. 인터넷에는 대한민국 ‘벚꽃지도’가 돌아다니고, 지인들은 내게 ‘사쿠라’가 피었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3월은 벚꽃들이 떼 창을 하는 시기니까, 꽃들이 소란스럽게 피어나는 때니까. 메시지를 보내온 지인에게 생생한 꽃 사진을 보내주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3월 중순이 되도록 꽃망울조차 달리지 않았다. 비 오고 흐린 날씨들이 계속되었다. 언제쯤 꽃이 필까? 나도 벚꽃 구경 가고 싶은데. 궂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4월이 되었다. 여린 잎들이 비죽이 얼굴을 내밀고, 꽃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폭죽이 팡팡 터지듯 잠자고 있던 꽃망울이 일제히 꽃잎들을 터트렸다. 자, 드디어 때가 왔다! 햇볕이 좋은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꽃놀이를 떠났다. 장소는 벚꽃 성지로 유명한 마이즈루 공원과 후쿠오카 성터였다.



    공원 초입부터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후쿠오카 주민들이 전부 다 왔나, 싶을 만큼 사람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중국어, 한국어, 영어로 미루어 보아 관광객들도 많은 듯했다. 평소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나이지만, 이 날만큼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활짝 핀 꽃 때문인지, 묘하게 작동되고 있는 질서 때문인지, 깨끗한 공기 덕분인지, 아니면 내 손을 잡고 방실방실 웃고 있는 아이 덕분이지 몰라도 말이다. 

    아마도 그 모든 것이 다 이유이며, 그 모든 것이 다 이유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살이를 시작하고 가장 달라진 점은 바로 내 마음이니까. 일 년 살이의 좋은 점은 사계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거였다. 반대로 아쉬운 점은 사계절을 한 번씩만 경험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 아쉬운 점 때문에 매 계절을 더 애틋하게,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낼 수 있었다. 일 년 살이 뿐 아니라 인생 전체가 일회성인 ‘하루’의 총집합이라는 점이 동일하겠지만, 어리석은 나는 이제껏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꾸역꾸역 쳇바퀴 돌아가듯 되풀이되는 일상이 지겨울 뿐이었다. 뒤늦게 이곳에 와서야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똑같은 과거가 없고, 반복될 내일이 없다는 것. 세상에 똑같은 꽃잎이 없는 것처럼 동일한 오늘도 없었다.     


    마이즈루 공원은 벚꽃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얀 벚꽃, 연분홍 벚꽃, 분홍 벚꽃, 진분홍 벚꽃, 하얀색과 분홍색이 한 잎에 같이 있는 벚꽃, 색들이 섞여 있는 벚꽃(벚꽃의 이름을 적고 싶지만 정확한 나무 명을 몰라서 꽃잎 색깔로 기억해 본다)과 가지가 수직으로 뻗은 벚꽃나무, 수평으로 들린 나무, 버들나무처럼 가지가 아래로 처진 꽃나무, 키가 작은 벚꽃나무, 나무 몸통이 굵은 꽃나무(역시 학명(學名)을 몰라서 나무 모양을 기록해 본다) 등 셀 수 없이 많은 벚꽃나무들이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나와 남편, 아이는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어느 쪽을 배경으로 해도 사진이 환했다.     


    마이즈루 공원과 이어진 후쿠오카 성터도 벚꽃들이 많았다. 마치 벽돌로 성벽을 쌓은 게 아니라 벚나무로 성벽을 만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벚나무 아래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휴식을 취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누군가는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낮잠을 즐겼다. 분주하면서도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후쿠오카 성터에서 내려오니 오호리 공원이 나왔다. 공원 부지에는 푸드 트럭이 즐비했다. 우리 가족은 타코야키와 츄러스를 주문했다. 돗자리가 없어서 흙바닥에 앉았지만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목이 말라서 자판기에서 물과 아이스크림을 사 와 먹었다. 콘 아이스크림을 파는 자판기라니. 정말인지 일본은 자판기 천국이구나. 라멘과 장어 덮밥 자판기를 보고 놀랐었는데. 냉동실에서 막 꺼낸 듯 한 아이스크림을 보며 또 한 번 놀랐다. 그렇게 작은 일 하나에도 놀라고, 의미부여를 하면서 간식을 먹었다. 

     푸드 트럭 옆으로 거리 공연이 한창이었다. 마술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동그랗게 앉아 있었다. 우리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관람을 했다. 만담을 하는지 마술사가 길게 길게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웃었다. 무슨 말인지 한 개도 못 알아듣는데도 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오늘은 진짜 이상한 날이다. 모든 것에 너그러워지고, 한없이 여유가 생기는. 고개를 돌려보니 남편과 아이도 웃고 있다. 역시나 일본어를 못 알아들을 게 뻔한데 함께 웃다니. 그러고 보니 마술사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다 함께 웃고 있었다. 분홍빛에 취해서, 꽃잎처럼 두 뺨을 물들이면서. 간질간질 봄바람에 몸을 맡긴 채 웃었다. 잊지 못할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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