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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zero Apr 29. 2024

두 개의 산책길

     집 주변에 두 개의 산책길이 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하구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길과 나무와 풀, 꽃에 둘러싸인 흙길이다. 두 곳 모두 산책하기 좋은 길이어서 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 산책길을 선택해서 걷는다.


    흙길은 나보다 아이가 더 좋아하는 길이다. 이 길은 놀이터 뒤쪽으로 이어진 공원을 통과하면 나온다. 아이는 이 길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춘다. 작은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학교생활을 말해 주고, 주말에 하고 싶은 게임 이야기를 슬며시 꺼내기도 한다. 아이가 이 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어서이다. 목줄을 한 대형견과 견주들을 제외하고는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잘 없다. 흙길보다는 그 옆의 바닷길을 더 좋아해서이다.

    하지만 아이는 바로 사람이 적다는 그 점 때문에 이 길을 좋아한다. 한국말을 툭툭 내뱉어도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없으며, 온몸을 움직여서 행동에도 제지가 들어오지 않아서 이다. 때로는 흙길 한가운데 주저앉아서 개미굴을 보고,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나 역시 아이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며 안정을 찾는다. 낯선 언어, 낯선 사람, 낯선 공간에 놓여있을 때의 긴장과 불안이 사라진다. 인적이 드문 길을 혼자 걸으면 무서운데, 작은 아이와 함께 있으면 그조차도 무섭지 않다.


    바닷길에는 항상 사람이 많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달리기를 하는 사람,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와 인증샷을 찍는 연인들로 가득하다. 물론 목줄을 한 반려동물과 주인들도 볼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길은 바닷길이다. 사람이 많아서 걷는데 제약이 있지만 바다와 강이 만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어서 매력적이다.

특히 이곳은 하루에 한 번, 밀물과 썰물에 따라 강바닥이 드러나기도 하고 잠겨버리기도 한다. 신기한 지구 같으니라고!


    갯벌이 나타나는 오후 3시 무렵이 되면 진풍경이 펼쳐진다. 어디선가 나타난 동네 사람들이 철제 담장을 넘어 바닷가로 내려간다. 특별한 장비는 없다. 반바지에 슬리퍼, 혹은 크록스를 신은 게 전부다. 가끔씩 밀짚모자처럼 챙이 큰 모자를 쓴 사람이 보인다. 다들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갯벌에서 뭔가를 찾아낸다. 조개나 작은 게인 듯한데 나는 멀리서 볼뿐이어서 정확히 사람들이 캐내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어깨에 걸친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넣던데 그 비닐봉지 안이 매우 궁금할 뿐이다.(갯벌에서 나오는 이에게 묻고 싶지만 내 일본어 실력은 미천하기 그지없다, 하하)


    그렇게 바닥을 드러낸 갯벌이 4시가 지나면 다시 물에 잠긴다. 바다에서 강의 하구로, 일방향으로 몰아치는 파도들이 보인다. 파고가 높은 파도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밀려오고 밀려오고 밀려오고. 파고가 점점 낮아져서 포말이 전부 부서질 때까지 하구로 밀려온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또 한 번 감탄을 하게 된다. 신기한 지구 같으니라고!


    언젠가 아이는 그 모습을 보고 우리가 대형 목욕탕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목욕탕 물마개를 빼서 바닷물을 확 뺐다가, 다시 목욕을 하고 싶어서 물마개를 끼운 것 같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바닷물이 빠졌다가 금세 채워지는 게 가능하냐고 말이다. 아이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정말인지 대형 목욕탕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조개와 작은 게들, 철새들이 날아온 대형 목욕탕. 사람들의 비닐봉지를 두둑하게 만들어 주는 인심 좋은 목욕탕. 누구나 들어와서 즐겁게 놀 수 있는 목욕탕을 상상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 갈래로 나뉜 흙길과 바닷길은 결국 하나로 만난다. 바로 바다가 나타나는 지점이다.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진짜 바다가 나온다. 집에서 이렇게 바다가 가깝다니!

   

    나는 부산에서 30년 가까이를 살았다. 일본에 오기 전까지 살았고, 일 년 후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갈 것이다. 외지 사람들은 부산하면 바다를 떠올리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산에 둘러싸여 있다. 바다를 보려면 차를 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 한다. 그래서 부산=바다를 연상하며, 내게 부산 바다에 대한 예찬을 듣고 싶어 하는 외지인들의 기대에 나는 이제껏 부응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기대를 무참히 깨트리는 쪽을 선택하면서, 부산에 대한 그들의 상상과 환상, 낭만이 사라지길 바랐다.

    그런데 일본에 와서 오히려 나는 바닷가 근처에 살게 되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와 바닷길을 보면서 외부인들이 부산 바다에 가졌던 이미지와 낭만들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생동감 넘치는 바다라는 슬로건의 뜻도 조금은 알 것 같고. 물론 나는 흙길도 매우 좋아하지만 말이다.

내부에 있었을 때는 몰랐던 것을 밖으로 나오게 되니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가지고 있던 생각과 편견과 가치들에 금이 가고 깨지며 조각이 나는 이 과정들이 즐겁다. 어쩜 이런 자극들을 원해서 일 년살이를 택했는지 모르겠다.


    일 년이 지나고 나면 나는 조금 달라져 있을까? 분명한 건 바다로 향하는 두 개의 산책길을 오랫동안 그리워할 거라는 점이다. 아마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아이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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