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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일럿대디 Nov 30. 2018

육아는, 부부가 함께해야 합니다.

유독, 육아를 힘들게 하는 사회적 통념

앞서 언급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과 함께 육아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생각은,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에요.

집을 치우고,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돌보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만 ‘실수’하는 부분에 미안해합니다. 행여나 ‘집안일’을 도와주면 그걸로 또 미안해요. 매번 외출할 때 아이가 다칠까 노심초사하지만 잠깐만 한눈팔면 아이는 넘어져 울고 있어요. 무릎에 작은 상처라도 나면, 아내를 포함한 가족에게 또 미안해집니다. 이렇게 미안해해야 하는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저에게 질문을 던져보았어요.


“난 왜, 늘 미안해해야 할까?”

답을 찾고자 과거로 돌아가 보았습니다. 제가 직장을 다니고 아내가 가사를 돌볼 때로 말이죠. 그때도 미안해했는가? 생각해보니,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직장에서 ‘잘못된 문서처리’로 상사에게 혼났다고 아내에게 미안해하지는 않았죠. 오히려 위로를 받았던 기억뿐이네요. 퇴근 후 모처럼 놀이터에서 나의 부주의로 아이가 다쳤을 때도 “일하고와서 힘든데 애까지 보느라 고생했어. 원래 다치면서 큰 거니 괜찮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 누구도 나에게 책임을 물은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사를 하는 우리는, 왜 미안해하나요. 반찬이 맛이 없어도, 아이가 다쳐도, 집이 더러 워도 난 늘 미안합니다. 반찬은 다시 만들고, 아이는 큰 상처가 아니라면 간단히 치료하고, 어질러진 집도 다시 정리하면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목에 틀어박힌 가시처럼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죠.


곰곰이 생각해 보아요. 미안해하는 감정의 근원은 ‘실수’에서 나왔습니다. 열심히 해도 자꾸 생기는 실수에서 말이에요. 요령이라도 피웠다면 덜 억울할 텐데, 최선을 다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오니 참기 어렵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요. 더 늦기 전에 실수를 만들어내는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제가 찾아낸 원인은 다음과 같아요.


우리가 직면한 실수의 원인은 ‘가사’의 집중에서 발생된 ‘과부하’ 때문입니다. 집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을 제외한 모든 집안일은 나의 몫이라 생각해 최선을 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일에 허덕이게 되죠. 어느 것 하나 집중해서 끝마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다, 결국 실수를 하고 미안해하는 일은 반복되죠.

그런데 여기서 한번 더 심도 있게 살펴보기로 해요. 보다 더 근본적 원인에 접근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도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같이 다음의 명제를 함께 고민해 보죠.


지금 이 시대, 가사와 육아는 왜 한 명에게만 집중되는가. 이것은 개인(가정)의 문제인가 아니면 사회 전반적 문제인가? 

여기서 문제의 원인을 ‘사회 전반적 문제’라고 가정했을 때, 이를 뒷받침해줄 근거는 어디 있을까요? ‘모든 집안일이 집중되고 한 명의 책임이 되는 이 현상’을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는 곳을 말이죠. 그곳은 바로 우리가 흔히 접하는 TV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지금, 집에 있는 TV를 켜보세요. 채널을 돌려‘드라마’를 보면 (꽤나 높은 확률로) 밥을 차리고 집안일을 하는 ‘여성’과 직장에서 돈버는 ‘남성’을 볼 수 있습니다. 가사와 직장일은 분리되어 있고, 집안일을 모두 아내의 몫이에요. 심지어 ‘더러운 집’을 보며 남자가 아내를 질책하는 모습도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냐!”라고 항의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어요.“요즘은 교육이 잘 돼서 앞서 예를 든 ‘가사의 집중’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이다.” “저런 건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상황 설정’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나, 현실은 조금 더 우울합니다.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 교육 현실조차 ‘성 불평등’은 뿌리 뽑히지 못했습니다. 2017년 보급된 초등학교 1, 2학년 교과서에서는 주로 남성은 생계를 부양하고 여성은 자녀를 돌보는 일을 포함한 '모든 집안일'을 하는 역할로 묘사되어있어요. 이 상황을 잘 설명해주는 교과서 삽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 가정의 아침 풍경입니다. 거실에 있는 아내는 분주히 아이들의 옷을 입히고 있는데, 뒤로 보이는 부엌에서 찌개가 끓어 넘치네요. 식탁 왼쪽 다림판 위 셔츠는 다리미에 검게 그을려 연기가 나고, 아내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남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출근 준비만 할 뿐 도와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아내의 책임’인 듯 말이죠.

출처 : http://edu.chosun.com/

이는 ‘삽화’가 포함된 특정 교과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주관으로 초등학교 저학년교과서 16권을 분석한 결과, ‘가정 내 성차별’외에도 직업의 차별화, 옷차림 등에서 남성주도의 활동 묘사 등이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음이 확인되었죠. 그러나 여기에도 반론은 존재합니다.


“우리 가족은 합의하에, 남편은 직장에 다니고 아내는 가사를 맡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불평등은 아니지 않나요?” “남자가 돈도 벌고 집안일도 하면 오히려 ‘역차별’아닌가요?”라고 말이죠. 위의 주장처럼 남편이 경제적 의무를 다하고 아내가 가정 일을 책임지기로 결정했고, 이 결정에 서로 합의하였다면 저도 그 주장에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 ‘동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로 한정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상황은 급격하게 내리막으로 치닫게 돼요. 자녀가 태어나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아내는 집안일을 할 수 없어요. 하더라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가난을 이야기 하지 말라.”라는 말처럼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못한 부분을 바로 이해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황가정’을 해볼게요.


그러면 지금부터 아이와 함께하는 하루를 직장생활에 비교해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다니는 직장상사를(이하 A) 떠올려보세요. 이제 우리가 눈뜬 순간부터 잠자리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생각만으로 이미 지쳐버린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시작이니 힘을 내 보아요.


자, 상사 A와의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A가 모닝콜을 대신해 우리를 깨울 거예요. 이미 지난밤 수시로 울어대는 A 때문에 잠을 못 이룬 터라 불만이 가득하지만 어쩌겠어요....... 애써 웃으며 일어납니다.  

생리현상을 해결하려 화장실로 향하는데, A가 따라와요. 같이 들어갈 수 없음을 설명하지만 제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화장실에 못 들어오게 하면 큰 소리로 울 것이 뻔하기에, 번쩍 안고 들어가요.

출근을 위해 세안을 하려해도 떨어지지 않는 A 덕분에 안고 씻어보려 했지만, 힘에 부치기도 하고 위험해 계속 안고 있을 순 없으니, 욕조에 물을 받습니다. 물이라며 신나게 놀고 있는 A가 다칠까 신경 쓰는 통에 머리는 어떻게 감고 세수는 제대로 했는지 기억도 안 나네요.

덕분에 오늘도 아침 시계는 빠르게 흘러갑니다. 간단히 샤워하면 될 것을 목욕을 한 탓에 출근하기 위해 옷 하나 제대로 고를 여유도 없는데, 옆에서 자신과 놀아달라며 A가칭얼댑니다. 마음만 급해지네요.

오늘 아침도 차려먹기보다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으로 허기를 때운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치일까요. A에게 밥을 먹여 주다 보니 저는 뒷전으로 밀려나 반도 넘게 남은 아침상을 뒤로하고 출근길에 오릅니다. 시작부터 느낌이 좋지 않아요. 첫 단추부터 잘못 넣은 느낌입니다. 출근하면 좀 나아지려나요?


그러나, 회사에서의 상황은 이보다 더 심각합니다.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분주히 자료를 만드는 내 곁에서 칭얼대는 A. 아무리 타이르고 애원해 보아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급기야 울음을 터트립니다. 더 이상의 회의 준비는 불가능해요. 중요한 거래처에서 전화를 받으려고 하면 빼앗아가고, 잠시 피로를 풀기 위해 커피 한잔 먹으려 해도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다며 울어버리는A가 너무나 밉습니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점심이라도 제대로 먹어야하지만,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정도면 그날은 잘 먹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시 뒤 A의 낮잠시간이네요. 1~2시간 낮잠을 자니 이때를 틈타 밀린 일을 해야 합니다. 하루 중 A 없이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일하기도 부족한 시간이라 나에게 쓸 여유는 없습니다.

할 일이 아직 남았는데 A가 일어났어요. 체력을 충전하고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A 덕분에 정신없이 하루가 지났습니다. 퇴근시간이에요. 이제 좀 쉴 수 있을까요?


이렇게 끝내기가 아쉬웠을까요? 퇴근 후 회식도 하고, 집에 와서 쉬기도 하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고 싶지만, A는 나의 사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집에서도 끊임없이 나를 찾기에 ‘퇴근’은 더 이상의 ‘퇴근’이 아니며 ‘또 다른 직장으로의 출근’이 되어 버리죠. 내일 아침에 있을 회의 자료는 손도 못 댔는데, 어느덧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습니다. 침대에 눕자 걱정이 밀려오네요. ‘오늘과 같은 내일이 또 다시 반복되리라는 사실’이 너무 무섭습니다. 내가 없는 나의 인생이며 오직 A만을 위한 시간들로 꽉 차있네요.


꽤나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완벽하게 비교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이기도 하죠. 그러나 ‘양육과 가사를 완벽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엔 충분했을 겁니다.


자, 앞에서 보았던 모든 것을 고려대상에 넣지 않은 채 육아와 가사, 이 두 가지를 억지로 한 명에게 강요할 수는 있죠.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 받으면서요. 이렇게 되면 위의 ‘상황 가정’에서 보았듯이 ‘나의 삶’은 없습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도 채우기 힘들죠. 그렇게 한숨 돌릴 여유가 없는 삶에서 오는 ‘과부하’는 ‘실수’를 만들어내고, 이 ‘실수’는 아내가 남편에게 미안해해야하는 이유가 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내가 미안한 이유는 ‘실수’때문이라고 했어요. 그 실수는 과도한 ‘가사의 집중’때문이라고 했고, 이는 자녀의 탄생에서 시작됩니다. 한 생명의 탄생은 소중하지만 계획 없이 마냥 기뻐해서는 안돼요. ‘육아’라는 새로운 과제 앞에 우리는 동등하게 서야 합니다. 육아는 ‘당연히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우리가 같이 해야 하는 일’이죠. 더 이상 ‘내가 사랑하고 아껴준 한 사람’이 감당하기 벅찬 어려움에 빠져 실수와 미안해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제부터 육아는 함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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