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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 Soup Apr 29. 2021

평균 연령 60세 미술반

향유와 몰입의 시간

 2017년 봄, 휴학생이었던 저는 목요일마다 동네 교회에서 하는 미술반에 다녔습니다.

 휴학을 하면 이런 저런 것들을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대학에서는 잘 배우지 못하는 것들을. 평소에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어릴 때처럼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마구 그려봤으면!'이라고 생각할 차에, 엄마가 보던 동네 교회 문화 프로그램의 전단지에서 초급 미술반을 발견한 것입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미술 학원보다는 덜 본격적이고 덜 부담스러운 느낌이라는 점이 맘에 들었습니다.


 

 미술반 강의실은 원래는 유초등부가 쓰는 듯한, 아기자기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햇살이 잘 들어오는 넓은 예배실이었습니다. 강의실 한 구석에는 이젤과 접이식 의자들이 놓여 있고, 그걸 하나씩 가져다가 다같이 강의실을 원형으로 둘러 싸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그럼 선생님이 둘러보시면서 체크를 해 주십니다. 여기까지는 일반 미술학원의 풍경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놀란 것은 수강생 대부분이 할머니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전체 인원이 열 명이라면 일곱 명 정도였습니다(나머지는 저와 아주머니 몇 분). 평일 낮에 제 또래는 보통 학교에 갈 것이기 때문에 연령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서도 왠지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긴장이 됐습니다. 아무래도 어른들과 대화할 때에는 더 공손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은 수업 시작 전에는 회계 담당 아주머니께서 회비로 사 오신 믹스 커피와 빵을 드시며(저도 회비를 내고 맛있게 빵을 먹었죠) 즐겁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하지만 수업시간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어느덧 강의실은 조용해집니다. 중간중간 돌아다니며 조언을 해 주시는 선생님의 말소리와, 잠시 쉴 겸 다른 사람들 그림을 보는 할머니의 ‘좋네~'하는 소리만 근근히 들려옵니다. (어떤 그림을 봐도 좋네~ 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제 그림에 집중했습니다. 처음에는 연필 쓰는 법을 배우려고 소묘부터 시작했습니다. 스케치북 한 쪽을 전부 연필로만 채워봤다가, 정육면체, 원통, 나중에는 과일을 따라 그렸습니다. 할머니들은 대부분 수채화를 그리셨는데, 보통 좋아하는 그림이나 직접 찍은 풍경 사진을 보며 그리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술반에서 온전히 자기만의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없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술반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어딘가 출품하거나 전시하기 위함이 아닌, 단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즐거워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풍경에 푹 빠져 무슨 색을 담고 있었는지, 어떤 선을 갖고 있었는지를 들여다보며 그것을 손으로 재현하는 시간. 오롯이 현재만을 위한 시간. 말하자면 '향유'와 '몰입'의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너무 많은 이미지, 영상, 정보가 눈 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좀처럼 사물을 깊게 관찰하고 느낄 여유가 없습니다. 목적과 결과를 향해 달려가다보면 어느덧 과정은 잊혀지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반에서의 시간은 굉장히 특별했습니다. 처음에 미술반을 신청할 때는 ‘멋진 작품을 그려야지!’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들이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시는 분위기에 따라 저도 점점 눈앞의 것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물감의 색과 물의 농도, 붓의 터치감.. 하나하나를 생생히 느끼며 뚜렷한 목표 없이 손을 움직이는 두시간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마지막 페이지

 미술반이 끝나고, 스케치북 마지막 페이지에 남은 그림은 수채화를 배우기 위해 그대로 따라 한 꽃 그림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자랑할 건 못 되지만 그릴 때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보라색과 파랑색을 섞어 만든 오묘한 색깔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러고 보니 미술반에 갔다가 집에 오는 길은 항상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마침 집으로 오는 길은 매 주마다 새로운 꽃들이 가득 펴서 나 홀로 꽃구경을 즐기기도 했었죠. 그 모든 시간이 저에게 충전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미술반에 다닌 것은 휴학을 하고 하길 잘 했다고 생각한 일 중 하나입니다.


 정신없이 살다 보면 문득 그 때가 그리워집니다. 따뜻한 햇살과 믹스 커피의 향기, 조금씩 잘라 종이컵에 담아 주시던 맘모스빵, 교회 앞에 흐드러지게 핀 철쭉과 개나리, 사각사각 연필 소리와 할머니들의 대화소리... 물감과 스케치북은 아직도 있지만, 그림 그리는 할머니들로부터 나오는 여유롭고 온화한 분위기는 그 때만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p.s. 다음에는 기타반에 등록하실 거라던 할머니는 지금 어떤 연주를 하고 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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