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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Mar 03. 2021

첫 탈고의 슬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퇴사를 한 것은 소설을 쓰기 위함이었다.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도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을 이골이 나도록 들었다. 내게는 간절한 '소설을 쓴다'는 말이 누군가에겐 남의 꿈을 가벼이 여길 정도로 과도하게 이상적인 일인가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했다. 내 마음은 결국 내 마음의 편을 들었다.


푹 빠져 있는 취미 생활이 있기에, 퇴사를 하고 나면 글을 쓰겠다는 결심은 깨끗이 잊고 무작정 놀기만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막상 그만두고 나니 몸이 저절로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이 답답해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내가 아니었다. 죽어도 상관없는 날들을 살다가 처음으로 죽으면 안 되는 날들을 지냈다. 이다음 문장이 명문이면 어떡해. 다음 글이 대박이면 어떡해. 내가 지금 죽으면, 내 꿈은 어떡해? 매일 아침 더 좋아질 내 글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을 떴다.


제대로 배운 적 없다는 이유로 쓰는 것을 두려워했던 시간이 아까웠다. 그동안의 내 인생을 허송세월로 치부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솔직한 마음이 그랬다. 다 경험이지. 네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양분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 양분 위에 찬란히 필 내 글을 생각하며 매일 몇 자라도 썼다. 그러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등단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요새 팔리는 다른 글도 같이 써야 하지 않겠어?'라고 조언했다. '퇴사는 좀 위험하지 않아?'라고 말했던 사람의 말이라 대충 듣고 넘겼다.


즐겁고 고통스러웠다. 세상에 태어나 해본 일 중 가장 흥분됐고, 흘려들은 조언보다 멋진 글을 써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달았다. 감각보다는 직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어서인지 에세이를 쓰는 것보다 백배는 재밌고 백배는 어려웠다. 꽤 오래 브런치에 글을 업로드하지 않았는데도 조금씩 늘어가는 구독자 수를 보며 가볍게 몇 자 써서 올릴까 하다가도 금세 한글 창을 켰다. 보름 만에 단편 소설 한 편을 탈고했다. 글을 쓰며 벽에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붙여두었던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개운한 기분으로 글을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은 몇 사람에게 파일을 보냈다. 제각각의 피드백이 돌아왔다. 떼었던 메모지 몇 장을 다시 붙였다. 그러니까, 탈고가 아니라 초고 완성이었다.


퇴고와 퇴고를 거듭하며 시간이 갔다. 숭숭 구멍 나있던 내가 만들었던 세계관을 기웠다. 피드백은 대체로 다 맞는 말이라, 아, 하고 뒤늦은 깨달음을 주는 것들이라 어째 덧대면 덧댈수록 누더기가 되는 것 같아도 멈출 수 없었다. 갸웃거리며 수정했지만 두 번째 탈고를 마치고 나니 나름 뿌듯했다. 이쯤이면 공모에 내볼 만도 하다 싶어 남편에게 글을 보여줬다. 나를 믿고 내 꿈을 응원해준 사람이니 최선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정도면 나를 믿어줄 만하지 않았느냐고 으스대고 싶었다. 남편이 말했다. "오, 재밌는데. 근데 공돌이의 관점에서 보면.."


맥이 빠지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 읽어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퇴고는 그만하기로 했다. 작가란 무릇 줏대가 있어야지. 자기 글을 사랑해야지. (내가 작가는 작가인가?) 그런 마음으로 먹고 탈고 기념 맥주를 두 캔 마셨다. 취기와 함께 눈물이 차올랐다. 재밌는데 어려워. 잘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해. 엉엉.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을 옆에 두고 아주 짧게 운 뒤 금방 눈물을 훔쳤다. 근데 재밌어. 계속할 거야. 남편은 결연하게 말하는 내 등을 두드려줬다. 손길에 신뢰와 위로와 삶의 동반자로서 전해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묻어났다.


다음 날 일어나서는 다음 글을 구상하기 위해 또 메모지를 잔뜩 벽에 붙였다. 떠오르는 장면들은 연한 녹색 포스트잇에, 중요한 키워드는 진한 포스트잇에 굵은 펜으로, 참고하면 좋을 작품들은 연보라색 포스트잇 위에 썼다. 샛노란 포스트잇에는 '세계관 깊게 고민하기'라고 적어 노트북에서 눈을 떼면 바로 보이는 곳에 붙였다. 다시 신이 났다. 속상한 일쯤이야 금방 잊고 앞으로는 다 잘 될 거라며 웃는, 경험 대신 직감을 믿는 내 성격이 마음에 드는 순간이었다.


백수가 되면 가장 먼저 브런치에 올렸던 글을 재정비하고, 브런치 북을 독립출판으로 책으로 만들어 보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다. 공들여 쓴 자식 같은 글들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다른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뱉고 싶은 말이 계속 떠오른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딱 알맞다.


부끄러워 글을 쓴다는 이야기는, 특히나 소설을 쓴다는 이야기는 꽁꽁 숨기고 살았다. 요새 뭐 하냐는 말에, 취미가 뭐냐는 말에 그냥 뭐, 똑같지, 별 거 안 해, 했던 날들이 지나고 언젠가 내 이름 앞에 작가 딱지가 붙을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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