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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스트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피난 간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펴보다

by 앨리쨔

나치를 피해 다니던 피아노 장인 애드리언 브로디가 이번엔 건축 장인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러닝타임이 215분에 인터미션까지 딸린 영화로.

한국에서 바로 며칠 전 개봉한 브루탈리스트의 따끈한 후기를 들고왔다. 미리 언급한다. 거진 4시간을 투자해서 보았고, '볼만은' 했다고 말하고 싶다. 일단 필자의 이야기 좀 들어보시라. 4시간짜리 영화를 리뷰하려면 갈길이 멀다 멀어.



감독: 브래디 코베

주연: 애드리언 브로디, 펠리시티 존스, 가이 피어스

이미지 및 정보출처: 네이버 영화


브루탈리스트? 그게 뭔데?

Brutalist(브루탈리스트)는 프랑스어 용어인 béton brut(가공되지 않은 콘크리트)에서 유래한 단어로, **정보 오류로 수정** 건축학적 의미에서는 특징 외장 없이 노출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건축물, 규칙적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적은 창문 노출, 기하학적인 건물 구조 등을 가진 방식의 양식을 추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본 영화에서의 브루탈리스트는 바로 주인공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이다. 영화는 아내 에르제벳(배우: 펠리시티 존스)의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전쟁으로 인해 핍박받던 유대인 라즐로와 에르제벳. 수용소로 끌려가 붙잡혀 있던 중 라즐로만이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탈출을 성공한다. 라즐로는 필라델피아에 사는 사촌인 아틸라를 찾아간다. 그가 운영하는 가구점에서 머물며 가구들을 손보며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자꾸만 어긋난다. 유대인임을 숨기고 억양도 미국인처럼 하는 아틸라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자신을 이따금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아내 오드리의 눈치까지 그들의 집 안에서 여전히 라즐로는 이방인이다. 라즐로는 계속해서 고맙다는 말로 그 불안을 없애보려하지만 쉽지 않다. 그 때 갑자기 들어오는 부잣집 도련님 해리의 요청. 해리는 아버지 해리슨(배우: 가이 피어스)의 서재를 서프라이즈로 꾸며달라고 한다. 라즐로와 아틸라, 낡고 지저분한 서재의 리모델링을 시작한다. 라즐로, 눈을 빛내며 모던하면서도 채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멋진 서재를 만들어간다. 궁핍한 현실에 행색이 볼품없고 우울하게 비춰지던 라즐로가 한순간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라즐로의 재능이 이렇게 빛나나 싶었지만 해리슨이 갑작스레 집에 돌아오고 자신의 집을 허락도 없이 망가뜨렸다며 내쫓긴다. 설상가상 해리가 집을 망가뜨려놓았으니 돈을 줄 수 없다고 말해버리는 바람에 아라에게서도 쫓겨난 라즐로. 막노동의 길로 빠지게 된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라즐로는 다친 후로 고통을 잊기 위해서 쓰던 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되어 막노동을 하며 술과 마약에 찌들어간다. 그러던 중 해리슨이 찾아온다. 서재의 인테리어가 잡지에 실리며 큰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해리슨, 라즐로가 그동안 만들었던 건축물 사진들을 보여주며 미안하다 사과한다. 라즐로, 괜찮다며 자리를 피하려는데 해리슨은 돈을 쥐어주고 급기야 일요일날 집에 오라며 초대까지 받는다. 라즐로, 전날까지도 술과 마약을 멈추지 못하고 헤롱거리다 해리슨이 보낸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한다. 라즐로가 맘에 든 해리슨, 자신과 필라델피아의 문화센터 같은 큰 건물들을 짓는 기획을 해보자 제안한다. 이방인 라즐로, 자신을 무시하고 배제하려는 미국인들을 위한 건물들을 짓기 시작한다. 과연 라즐로는 자신의 건축물을 온전히 완성할 수 있을까?



볼만한 이유 1: 이방인의 시선

헝가리계 유대인인 라즐로는 영화 내내 이방인으로 자리한다. 자유의 나라,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에 도착했건만 기회와 자유는 다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겨우 목숨을 건져 전쟁에서 탈출한 라즐로는 가난했고,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외국인일 뿐이었다. 영화에서는 이런 이방인 라즐로가 바라보는 미국에 대한 시선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처음 뉴욕을 통해 미국에 입국하던 이민자들의 모습들을 통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 정점은 역시 라즐로가 처음 해리슨의 집에 들어갈 때였다. 술과 마약에 찌들고 고된 노동에 지저분한 몸을 해리슨이 준 말쑥한 연미복으로 가렸지만 라즐로는 척 보아도 그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혼자서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해줄 때 화면은 두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번갈아 비춘다. 비싼 귀걸이를 차고, 아름다운 와인잔에 향긋한 와인을 마시며, 번쩍거리는 시계와 양복을 정돈하는 평화로운 미국인들의 모습들을 불안하고 이상한 것처럼 번갈아 보여준다. 그것이 라즐로의 시선이었으리라. 당장 자동차를 타고 조금만 가면 먹을 것이 없어 굶거나, 비싼 시계나 귀걸이는 커녕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고공에서 줄 하나에 의지해 일하는 이들이 있다. 저 바다 건너 고국에는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화려한 그들의 삶이 이해될 리도, 섞일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라즐로는 영화 내내 이방인으로 자리한다.


볼만한 이유 2: 아름다움으로 그려낸 불안함과 긴장감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불안함'과 '긴장감'이다. 그런데 그것을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한다. 무슨 말이냐면 불안함과 긴장감을 만들기 위해서 보통은 깜짝 놀라킬만한 요소들을 등장시킨다. 피라던가 무서운 괴물이라던가. 하지만 부르탈리스트는 건물들이나 자연의 모습들을 아름답게 보여주는데 '압도감'을 통해 불안함과 긴장감을 부여한다. 건물의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함이나 눈이 부시는 화려함을 부각시키고, 자연의 끝없는 것 같은 드넓음을 보여주고 새파랗게 질린 듯한 대리석들의 모습을 멀리서 보여주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당하고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또 빛과 어둠을 대비를 크게 시켜서 평화롭고 따듯했던 장소도 어둡게 설정하면서 갑자기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방인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들의 불안감과 긴장감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꽤나 인상적인 표현 방법이었어서 영화적 표현들을 찾고 즐기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보라고 말하고 싶다.



볼만한 이유 3: 그 땐 그랬지(feat. 1930년대 미국 속 차별)

본 영화도 논란에 휩싸였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논란되었다는 사실만 듣고 '아, 너무 길어서 욕 먹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여성혐오와 관련된 논란이었다. 맞다. 곳곳에 여성혐오적인 내용들이 있었다. 갑자기 시작부터 라즐리가 매춘을 하지 않나, 매춘부한테 외모 평가를 하지 않나(물론 그녀가 자신이 맘에 안드는 부분을 이야기 하라하긴 했다.). 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소수였고 그중 대부분은 옷을 벗은 채 나왔다가 바로 사라진다. 필자도 보면서 종종 불편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볼만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영화가 당시 미국의 현실적인 시대상을 그려내면서 생겨난 불편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차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전반에 깔려있던 차별들이 은근슬쩍 등장한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가난에 대한 비웃음(이건 지금도 그렇지만....), 여성의 능력에 대한 무시(아틸로가 사업하면서 매장은 오드리가 다 꾸몄는데 아내가 하는 일은 없다는 식으로 말함 등) 등등. 그를 의도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쟁 직후의 여성인권이 얼마나 바닥이었는지를 떠올려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혹은 '그걸 표현하려고 했나보다'란 생각이 들며 불편함이 조금은 가라 앉는다. 또 영화 속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캐릭터인 에르제벳은 이런 차별들에 직접적으로 싸우고 차별자들을 꼽주는(?) 당찬 여성으로 나오기에 영화가 여성을 완전히 배제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물론, 이런 여성 캐릭터들의 부각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있었고 굳이 베드신들을 적나라하게 넣어야 했나 싶은 의문이 조금 들긴 하지만 필자가 볼 때는 전반적으로 이해가 가는 수준이긴 했다(선정성 부분은 사실 더 적나라한 영화들을 봐버렸다...ㅠ). 이런 여성 혐오에 대한 우려나 불편함 때문에 영화를 보는 것이 망설여진다면 필자가 느낀 부분도 고려해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남긴다.


한줄평(★★★★)

사실 그가 세우고 싶었던 것은 스스로가 온전히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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