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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Nov 16. 2023

죽이 되든 밥이 되는 내가 알아서 할게




죽이 되든 밥이 되는 내가 알아서 할게      



좀 우스운 얘긴데, 한때 나는 내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도 했다. 그만한 실력이 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문과!라고 이마 한가운데 낙인찍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다. 요즘 말로는 수포자였다. 그런 내가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려고 시도했다. 내가 모르는 걸 물을까 봐 며칠 전부터 끙끙대며 공부해야 할 정도였고 그나마 미리 공부한 것도 다음날 상황이 막상 닥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외웠던 공식을 잊고 당황한 게 부지기수다. 한마디로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사람이 선생 노릇을 하려고 했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공부한다는, 보기 좋은 장면을 연출한다는 자의식에 빠져 책상에는 같은 교과서와 같은 참고서를 펴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가르치는 것도 아니었고 일종의 감시였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 것은 부모는 자식에게 뭘 가르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뭐라고 뭐라고 말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그런지 손기술이 대단한 어떤 장인이 자기 자식에게 기술을 전해줬을 때 부모만큼 하는 자식은 별로 못 본 것 같다. 장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자식에게 기술을 전수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가르쳐 놓고 보니 나보다 낫다.” 그렇게 말하는 건 아마도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거기까지 온 자식을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자기 위안일 수 있다. 반대로 운이 좋은 경우라면 부모만큼이나 그 일이 좋아서 자발적으로 기술을 연마한 경우다. 아마도 장인은 왜 나만큼 못하냐고 닦달하지 않고 자식이 자기 손끝에서 나오는 감각의 완성을 가만히 기다려 주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자발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걸로 족한 것이다.     



      

나는 아이가 나와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걸로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엄마가 하라는 대로 군말 없이 따르는 아이였으니까, 당연히 아이도 특목고를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그때쯤이었다. 출근하던 길에 아이의 문자를 받았다. 학교에 갔을 아이에게 문자 메시지가 오는 일은 드물기에 놀란 마음에 확인해 보니 엄마! 가방에 편지. 암호와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읽은 그때의 심정을 고사성어로 말하자면 청천벽력이었다. 아이는 그 편지로 일종의 도전을 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나는 앞으로 내 갈 길을 가겠어요. 엄마가 원하는 직업 말고 그림을 그리렵니다. 나중에 그림으로 밥벌이를 못하더라고 개의치 않을래요, 밥을 굶어도 내가 굶고 후회해도 내가 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저를 믿어주세요.      

이런 편지를 지금 받았다면 이놈 참... 뭐라도 될 놈이네.. 하고 기특해하면서 그래! 한 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아봐! 엄마는 열심히 응원할게! 했겠지만 그때는 눈앞이 깜깜했었다. 어쩌다가 부모 앞에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막 떠드는 아이로 키웠을까. 다른 건 몰라도 내 말은 잘 따르는 아이였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비뚤어진 걸까. 그나저나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한다면 모든 계획을 원점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준비할 시간이 모자란다. 잘못하면 특목고도 예술고도 다 물 건너갈 수도 있다. 실기를 준비할 시간과 예술고등학교의 전형을 살펴보면서 이런저런 계산을 해봤지만, 합격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엄마 말 들어. 엄마가 너보다 먼저 세상을 살아봐서 알잖아. 진로는 그렇게 결정하면 안 돼. 철이 없어서 지금은 네가 모르지만 그림으로는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다니까. 엄마도 할머니가 반대했는데 고집부리다가 이렇게 힘들게 살잖아.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 인생을 알아서 한다는 말에 두 손 두 발 들었다. 거기다가 무슨 이유인지 나에게는 없는 합격에 대한 확신이 아이에게는 있었다. 그렇게 나는 딸아이를 내 말 듣는 자식으로 키우는 데 실패했다. 다행히도 딸아이는 자신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쓰며 그렇게 성장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을 빈 구멍 하나 없이 꽉 찬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 없이 쫀쫀한 성격이면서 반면에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갈 만큼 겁이 많으니, 실수도 크게 안 하고 내 앞가림은 스스로 알아서 할 거라고 믿으면서 아이도 그렇게 키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되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알지 못한 채 덜컥 아이를 낳고 적어도 남들처럼은 키울 수 있다고 조금은 자신만만했던 것 같다. 공부를 곧잘 하던 아이를 보면서 이대로만 따라오면 최상위권도 가능하겠다고 희망을 품은 적도 있었다. 글자 그대로 엄마가 제시하던 방향으로 따라오던 아이에게 어느 날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오고 불면과 불안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면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지나치게 꽉 차 있던 내가 문제였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가 빈 구멍이어야 아이에게 맞춰 소리가 날 텐데 나는 단단한 시멘트벽 같은 사람이었다. 나란 사람은 아이를 숨 쉬게 할 바람 한 조각조차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울었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한다.           

내가 아이에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엄마가 살아보니, 엄마가 겪어 보니, 그야말로 꼰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나라고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 그야말로 어느 날 눈떠보니 꼰대가 돼 있었다. 반면에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달라져서 적응하기도 벅차다.

물건값을 현금으로 주려다가 거스름돈이 없다고 해서 구입하지 못한 적도 있고 얼마 전에는 현금을 안 받는 버스를 탄 적도 있다. 키오스크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어른을 자주 목격한다.

놀랍고 생소한 일상이 매일 다르게 펼쳐지는 느낌이다. 지금 딸아이가 사는 세계에서 내가 살며 겪고 느끼고 배운 것들이 소용이나 있을까 싶다. 따지고 보면 내가 하는 말은 내 인생과 내 사건의 결과물일 뿐이니까. 어쩌면 기성세대가 남긴 것은 요즘 사람들에게는 찌꺼기일 수 있다. 내가 겪고 느끼고 정리한 걸 이론이라고 할 때 나의 이론은 그저 내 사건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이라는 이름 때문에 효용성이나 진리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모르긴 몰라도 생산되는 그 순간에는 진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그건 단순히 침전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오히려 어른들이 남긴 찌꺼기에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엄마를 포함한 이전의 세대가 남긴 이론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적당히 알아두는 정도로 생각하라고, 다음 사건에서는 또 다른 이론이 생길 테니 네가 발 디디고 있을 곳은 현재의 사건과 지금의 감각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맞다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혼자서 할 뿐이지. 절대 말로 꺼내지 않는다.

말로 하지 못하는 이야기는 기껏해야 이렇게 글로 쓰고 마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살아생전 자식을 포함해 타인에게 충고하지 않기를 선언했다. 왜 이런 걸 선언씩이나 했냐면 죽을 때까지 왔다 갔다 할 인간이라서, 그래서 선언이 필요했다. 나라는 사람은 타인을 돌보는 것보다 나를 돌보기 급급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게 더 바쁘다. 그러니 어쭙잖은 충고 그만하고 각자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다. 엄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했던 딸의 말을 기억하면서,      









효도는 살아있을 때 부모의 말을 안 듣다가 그걸로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하면 부모는 자식의 모든 선택과 결정에 대해 지지하게 되고 네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거야말로 진정한 효도인 것 같다.

나 역시 아이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았을 때 딸아이는 서서히 내가 반대한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자기 인생을 알아서 잘 사는 자식을 두고 부모는 눈 감을 때 편해질 것이다. 적어도 얘 놔두고 어떻게 눈 감지?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내가 없어도 잘 먹고 잘살게 키우는 게 목표였는데 적어도 그건 이루고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낙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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