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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Mar 20. 2024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최은영

안다고 말하는 것

나는 이모가 싫어했던 것들을 종이 한 장에 빡빡하게 쓸 수 있다. 춤추는 사람, 연예인들이 웃고 떠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 짧은 치마, 길에서 노래 부르기, 껌으로 풍선 불기, 강아지를 자식처럼 예버하는 사람, 헤픈 웃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태도, 술에 취한 사람, 경박한 사람....

울고 싶으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어. 네 방문을 닫고 울어. 징징대면서 네 기분 받아달라고 하는 거 좋아할 사람 세상에 하나도 없으니까... p 217





소설에서 화자는 이모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했다. 종이 한 장에 빡빡하게 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다음에 커서 세상 사람들이 너를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하는 걸 원하냐며 경고하듯 냉담하게 말하는 이모를 몰래 미워했고 이모의 양육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모는 왜 그렇게 싫은 게 많은지, 왜 모든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좋은 면을 보려 하지 않는다고 오해했다. 때때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을 마음속으로 하면서 차츰 이모와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모의 삶을 통과한 세계관과 해석이 자신에게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모와 비슷한 주름을 얼굴에 새기면서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가는 인간, 자기 상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의 상처는 무시하고 별것도 아니라고 얕잡아 보는 편협하고 어두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세월이 흐르고 늙어버린 이모의 얼굴을 보면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나는 흡사 수도승처럼 일정한 시간에 자고 제한적인 것을 먹고 다른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책을 읽고 다음날이면 어제와 똑같이 삶아 놓은 달걀과 직접 만든 요거트로 아침을 먹으면서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산다. 앞으로도 이런 단조로운 일상을 지속하길 바란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 물에 잠겨 같이 흘러가고 싶다. 그러나 혹자는 말했다. 한 번 사는 인생 왜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사냐고 또 어느 날은 내가 보는 영화 제목을 보고는 대뜸 현실에도 괴로운 일이 넘쳐나는 데 굳이 이런 영화를 찾아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이해한다. 그의 세계관은 그런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나온 것이 그의 생각이니까.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어차피 인생은 수수께끼 같다. 오십이 넘으면 좀 풀릴 줄 알았는데 세월이 갈수록 수수께끼는 더 어려워지기만 한다.  57세가 돼도 뭐 하나 쉬운 문제가 없다. 나는 보기보다 둔해 눈치가 빠른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일 때 맹하다. 예전에는 상대가 나에 대해 엉뚱한 오해를 하거나 화를 내면 내용도 정확히 모르면서 먼저 사과부터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수께끼 같은 문제가 내게 주어졌을 때 인간이 반드시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한다. 과학이라는 것이 분명히 유익하지만 그건 삶의 일부분에만 작용할 뿐이다. 특히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선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이기가 더  어렵다. 하루의 대부분을 습관적인 행동과  망상 따위를 하는 나라는 인간만 봐도 알 수 있다. 망상 역시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망상이 결국 문학상을 타는 소설을 쓰고 영화도 만드는 것 아닌가.

모르긴 몰라도 인간 사이의 갈등은 50 대 50으로 각자의 문제일 경우가 많다. 서로가 상대에게 오해할 준비가 되어있을 수도 있고 별일 아닌 일에도 상처받기 쉬운 사람 두 명이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상대가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이 지나치게 비대한 두 사람의 만남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는 그런 사람, 나도 그런 사람.
인간이란 모름지기 뒷북의 천재다. 미워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달라질까 말까다. 한 사람의 모든 평가와 판단을 전부 모은다고 해도 그것이 그 사람의 진실에 가닿을 수는 없다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는〕 속 문장을 죽음에 직면해서는 떠올릴 수도 있으려나. 인간은 참으로 미련하고 고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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