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같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크게 홍행하던 시기에 20대를 통과했다. 영화를 함께 봤던 친구들과 나는 결말이 행복한 결혼임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줄리아 로버츠와 맥 라이언이 핑크 빛 인생으로 직진하는 이유가 괜찮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 때문이라고 내심 부러워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동경하던 세 여자는 상대가 나타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차례대로 결혼했다. 좀 우스운 고백을 하자면 우리는 결혼한 순서와는 반대로 하나둘 이혼했고 독자들이 알다시피 나는 이혼했던 그 남자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산다. 말하자면 당시 우리는 로맨틱 코미디 속 결혼이 결혼의 다가 아니란 걸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SNS 가 없던 시절이라 결혼을 잘한 것처럼 보이는 친구의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 상상력을 부추겼다. 내 손으로 꾸리는 따스한 가정의 풍경은 어떨까. 혼수로 어느 브랜드의 옷장을 샀네. 신혼부부에게는 몇 리터 냉장고가 좋은 선택이네. 하는 말이 오가면 마냥 부럽고 왠지 모를 압박감을 받았다. 지금이라면 결혼하지 않은 지인들이 올리는 음식과 비싸 보이는 와인, 여행지의 풍경,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인스타그램 속 사진을 들여다보며. 아, 이쪽도 좋아 보이네. 하고 은근슬쩍 중립에 서 있을 여유가 있었을 테지만 그 시절의 여자는 대부분 결혼 아닌 삶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구든지 나에게 알아들을 때까지 자꾸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대로 살아도 괜찮다.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 범주에 포함되는 일이 아니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세상에는 수많은 인간이 수많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걸 찬찬히 지켜보고 선택해도 늦지 않는다고.
딸애가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하기 시작한 지는 좀 오래됐다. 미끄럼틀을 타고 놀다가 중요한 일이 생각난 것처럼 뛰어와 “엄마 나는 결혼 안 할 거야.”라고 말해서 속으로만 어린애가 별소리를 다 하네. 생각하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서 놀아”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남자애들과의 경쟁에 유난스럽게 몰두하길래 이 역시 속으로만 그래 네가 살아갈 시대는 다르지, 여자가 남자를 못 이기라는 법은 없지. 공부든 운동이든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고 평가 받는 시대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딸은 성인이 되고도 연애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남자 친구는 없니? 하고 은근슬쩍 물으면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며 고개를 저어서 쟤가 저렇게까지 질색하는 걸 보니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지도 모른다고 짓궂은 짐작을 한 적도 있다. 어느 날은 이상형이 어떤 사람이야? 물으니, 이상형을 묻지 말고 싫어하는 스타일을 묻는 게 대답하기 쉬울 것 같다고 답해서 나를 아연실색하게 했으며 실제로 잠깐 사이에 남자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족히 서른 가지는 말했다. 나는 결혼 같은 건 엄마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결혼은 안 해도 되니 연애는 가능한 많이 하라"고 말했다. 딸이 말한 남자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 나이 여자라면 흔히 느낄법한 것이었지만, 미간에 주름까지 잡으며 말한다는 건 지나친 거부감이 아닌가 하고는 혹시, 혹시, 진짜 그럴 일이 생길까 하면서도 "얘 진짜 여자 좋아하는 거 아냐?" 하고 생각했다.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내 머릿속을 꽉 채운 건 내가 딸에 대하여 라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이었다. 딸이 목격한 결혼은 이런 것이다. 엄마는 결혼 얘기만 나오면 여전히 울분이 터지고 아빠의 공감 능력과 눈치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다. 가장 가까이서 본 결혼한 여자(엄마)는 불평등을 겪었고 남자(아빠)는 가장의 책임에 짓눌려서 인지 표정이 굳어있고 말수가 적다. 엄마 아빠 때문에 나는 결혼이 시들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어. 아빠 때문에 남자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돼서 결혼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나 봐' 엄마 아빠가 보여 준 결혼 생활이 온통 상처투성이라 도무지 연애를 할 수가 없어. 나는 딸이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혼자 웅얼거리다가 겨우 잠이 든다.
딸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질색하는 건지 아니면 이성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당사자가 내 인생이니 결혼을 안 하던 연애를 안 하던 엄마는 상관하지 말라고 하면 말 없이 지켜봐 주는 것이 맞지.. 생각하다가 결혼 생활 28년을 또 돌아보았다. 다행한 불행을 쓸 당시와 지금은 상황과 여건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좋았던 일보다 힘들었던 일이 더 많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세월이 흘러도 너무 흘러 후회와 회한 조차 희미해지고 말았는데 지금 와서 딸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힘든 일이 생겨도 모든 걸 감수하고 배우자와 함께 뚫고 나가는 것도 다른 형태의 사랑이라고 말할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전우애도 나름 가치 있다고 말해 줄까. 싱글로 사는 일은 혼자라는 두려움에 시달릴 수 있으며 사회적 불이익과 온갖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고 혼자 아픈 몸을 끌고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응급실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들이 너의 삶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응원을 해줘야 할까.
그러다 문득 이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엄마들은 이미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평온한 사람이다. 자식들에게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무언가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얼마나 황당한지 때로는 난폭하고 또 얼마나 위험한지 그러다가 가끔 찾아오는 행복은 또 얼마나 달콤한지, 돌고 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삶의 무거움을 딸에게 최대한 객관적이고 담백하게 전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 잘 모르겠다. 삶을 통해 익은 생각을 여기에 쓰다 보면 딸에게 닿을 의미 있는 이야기 하나라도 발견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