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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들여다보는 게 왜 중요한가

귄터 그라스 | 양파 껍질을 벗기며

by 김설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양파는 겉껍질을 하나씩 벗겨낼 때마다 새로운 층이 드러나지만, 완전히 중심에 닿을 수는 없는 구조다. 그라스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기억과 자기 고백을 겹겹이 벗겨내는 과정을 “양파껍질 벗기기”에 비유한 것이겠다.

이 과정을 쓴 책은 고통스럽고 때론 눈물을 흘리게 하는데, 개인적·역사적 진실을 마주하는 일의 아픔이 잘 드러나 있어서다. 그라스는 이 자서전에서 젊은 시절 나치의 SS(무장 친위대)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고백했는데, 이는 독일 사회와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작가는 이 과거를 숨기고 살아온 자신을 마주하면서, 기억을 꺼내고 인정하는 과정이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며 눈물을 흘리는 것과 닮아 있다고 본 것이다. 『양파 껍질을 벗기며』는 기억·자기 고백·죄의식·역사적 책임을 드러내는 작업을 은유한 제목으로 적절하게 잘 붙인 제목 같다.
귄터 그라스의 자서전 『양파껍질을 벗기며』는 그의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이 책은 그라스가 겪었던 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의 격변기가 배경, 그가 어떻게 문학가로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라스는 독일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개인의 고통과 기억을 탐구하면서 작정하고 쓴 글로 보인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라스가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한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를 서술한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고통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독자에게도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려고 노력한다.
그라스는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치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비밀스러운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고 아픔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것과 인간이 자기 과거의 아픔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양파껍질을 벗기며』는 귄터 그라스의 문학적 재능과 인간적인 깊이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작품 해설을 포함해 573페이지에 달하는 자기 고백은 숭고함마저 느껴질 정도고 작가의 기억력에도 감탄이 나온다.
작가는 자신의 아픔이나 상처를 가볍고 짧게 본 것이 아니라 오래오래 들여다봤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난데없는 욕구가 생겼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처 치유의 과정을 짤막하게나마 쓰고 싶어진 것이다.
자기의 아픔을 오래 들여다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이야기다. 이 글을 누군가가 우연히 읽는다면 불안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꾸준히 실천해 보고 정리한 내용이니까 믿으셔도 된다.


내 안에서 무슨 감정이 올라오는지 알아차리면 막연한 불안이 줄어든다. 그 감정에 이름까지 붙여주면 더 좋다. 이름이 붙는 순간 ' 아 이런 감정이구나' 하면서 겁내지 않아도 된다.
자기감정을 오래 들여다보면 어떤 패턴이 보인다 어떤 상황·사람·말투가 트리거가 되는지 알아차리게 되고 그러면 즉각적인 반응 대신 선택할 여지가 생긴다.
또한 감정을 견디는 힘이 커진다. 피하면 더 커지는데, 안전한 범위에서 천천히 마주하면 신경계가 “이건 지금은 안전하다”를 배우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덜 휘둘리는 기분이 든다. 흠.....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오래 들여다봤을 때 좋았던 건 기억을 다시 엮게 된다는 점이었다. 예전 상처가 현재의 나와 새롭게 연결되면 의미가 바뀌어 같은 기억이더라도 부서진 조각에서 한 편의 이야기로 재구성되는 느낌이랄까. 오래 숨겼던 감정에 따뜻하게 다가가면서 자기 비난 대신 자기 연민이 자란다. 그게 치유의 시작이었다.
“나는 이런 일을 겪었고, 그래서 이렇게 성장해왔다"라는 연결감이 생기고 상처라는 놈이 운전대에서 내려오고 내가 운전대를 잡는 순간들이 늘어난다고 표현하면 이해가 쉬울까.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건 있다. ‘오래’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곱씹기와 치유적 탐색은 다르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그게 어떤 차이가 있냐면 치유적 탐색의 느낌은 새로운 이해가 생기고, 감정 강도가 서서히 내려가며 몸이 조금 편안해진다면 곱씹기의 느낌은 불쾌한 장면만 맴돌고 자책이 커지고 몸의 긴장이 더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가 몸의 곳곳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땐 멈추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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