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정 Dec 17. 2018

지금 바닥입니다.

프리랜서입니다.

나는 프리랜서다. 웹툰 작가다. 일러스트레이터다. 시간이 자유롭다는 디지털노마드다.

이렇게 나열할 필요도 없이 프리랜서의 '프리(free)'만 말하는 순간 프리랜서가 아닌 상대는 부러움의 눈길을 보낸다. 하지만 대부분 프리랜서들의 실상은 그렇게 달콤하지도 매력 있기도 힘든 경우가 태반이다. 불평은 절대 아니다. 직장인과 프리랜서의 일장일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초반에는 당장 하던 사무직 월급쟁이를 그만둘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초반 2년 동안은 초과근무가 필요 없도록 스케줄 근무가 가능한 직장을 찾아 전전했다. 퇴근을 하고 나면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가 출근했다. 계속 그렇게만 유지한다면 주머니 사정과 커리어 갈증 둘 다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쳤다. 좀 더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그림 실력을 늘리고 싶은데 투잡 때문에 방전이 됐는지 조금이라도 남는 시간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웹툰 작가로서의 일감이 늘어날수록 욕심은 커져갔지만 부족한 시간과 바닥난 체력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매번 답답했다. 분명 돈도 벌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있었지만 두 마리의 토끼가 모두 도망갈 것 같았다.


한곳에 집중하자. 경제적인 부분은 최대한 소비를 줄이고 커리어를 쌓으면서 메꿔보자. 내가 원하는 것에 최대한 시간을 투자하자. 호기롭게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2년이 지났고 그리고 나는 지금, 또다시 '투잡을 해야 하는가' 고민의 기로에 서 있다. (응?)


기대한 흐름과 달리 한 토끼는 자취를 감춰버린 지 오래고, 또 다른 토끼는 아직 내 손안에 있는 것 같긴 한데 점점 빼빼 말라 갔다. 프리랜서로 선언한 직후 아주 잠시 동안 벌이가 괜찮았을 때(이럴 때 정말 조심하자..!) 그 놈의 '시간이 자유롭다'는 디지털노마드의 장점을 백분 발휘하고 싶었다. 가고 싶었던 여행을 계획 없이 덜컥덜컥 정해버렸고 욜로가 한창 유행이었던 흐름에 취해 골로 가는 객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프리랜서로 선언한 2년간 길고 짧게 총 8번의 해외여행을 떠났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로또라도 됐거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줄 알았다며 농담인 척 꾸짖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었던 일감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외주가 아예 끊긴 건 아니지만 이미 여행으로 깨뜨린 단지에 돈을 부어봐야 모을 수가 없었다. 대책 없는 여행은 투잡으로나마 개미같이 모아놨던 비상자금의 휑한 바닥을 보여줬고,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이 되어 버렸다.


돌이켜보면 프리랜서 초반, 자만심에 찌들어 있었다. 계속 일이 끊이지 않고 들어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믿음 덕분에 소득이 불안정하다는 '프리랜서'의 기본적인 맥락을 망각했다. 할 말이 없었다. 뭐든 쉽게 생각한 탓이었다. 이로써 호기롭던 내 프리랜서 인생은 짧고도 처절하게 실패했다. 경력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커리어는 빛조차 썩은 개살구가 된다.

다시 기로에 섰다. 나는 이제 다시 생계를 위한 직장인 혹은 알바생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자취를 감춘 토끼를 찾아 나설지, 아니면 지금 내 손안에 있는 토끼에게 개살구라도 먹일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예상되는 흐름을 한 번 더 비틀어보자. 그렇다. 후자를 택했다.

분명 경제력에 실패했다. 기왕 실패한 거, 좀 더 철저하게 실패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응??)


몰아쳤던 여행을 통해 웹툰 소재를 얻고 밥벌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을 핑계 삼아 이번엔 여행에서 한 술 더떠 '한 달 살기'라는 흐름을 따라가기로 했다. (...) 이미 바닥이니, 그 바닥에서 곡괭이 질을 몇 번 더해도 다를 것 없다는 심정이라면 설명이 좀 더 쉬울까. (이해해주지 않아도 된다. 그걸 바라면 내가 양심이 없는 거지.) 아무튼 지금 경제력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면, 쇠사슬을 채워 말뚝을 박기 전까지는 질질 끌고 가볼 작정이다.


그리하여 한 달간의 유예기간을 가지려고 한다. 기왕 망한 거, 제대로 후회 없이 망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기분으로. 뭔가 읽으면서도 탐탁지 않고 참 마음에 들지 않는 흐름이란 걸 안다. (나도 내가 찝찝한 걸.) '아니 결국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걸 뭐 이렇게 구구절절 써?'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선택을 한 나 자신조차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래도 되는 것인지.

기록을 남겨서 객관적으로 곱씹으며 아무런 변명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결과에 승복하기로 결심했다.



2019년 1월 15일부터 2월 20일까지.

방콕행 항공권을 결제했다.



그렇다. 나는 실시간으로 내 바닥을 중계 중이다.

제목에 반전은 없다. 결과가 어떨지는 나도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