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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정 Jan 21. 2019

한 번의 실패와 한 끗으로 살아가기

기어이 떠납니다.


지금 방콕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프리랜서로서의 경제관념이 바삭하게 메마르고 필연적인 '투잡'의 기운이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뒤쫓아 왔을 때 보란 듯이 태국 한 달 살기를 결심했다. 기왕 실패한 거 바닥까지 찍고 점프하겠다는 객기로 일을 벌이고 그를 대비한 무장을 하기까지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이렇게 인천공항 24시간 카페에 앉아있다.




외국에서 여행과 일을 병행하면서 지원을 받아 더 인지도를 쌓겠다며 가족들에게 떵떵 큰소리를 지르고 캐리어를 싸 들고 나올 때까지 그 말이 사실이 되게 하기 위해 발악을 했다. (전편을 보신 분들은 작가가 얼마나 돼먹지 못한 인생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계실 것이다.) 그 발악의 결과는 어땠을까?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역시나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런데도 또 무슨 깡으로 이런 글을 써부리고(?) 있는 걸까.


또 한 번의 실패 과정을 나열하기 전에, 그동안 프리랜서로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었는지부터 떠들어야 할 것 같다. 처음에 어떻게 일을 구했을까? 누가 내 머릿속에 들어가서 내 능력을 알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애초에 '일감'을 어떻게 가져와서 '프리랜서'가 되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치기 어리던 시절에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웹툰을 그리고 싶으니까 웹툰을 많이 그려서 포트폴리오를 많이 쌓고 차근차근 계속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감이 들어올 것이라고 투명하고도 순수하게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해맑다 싶지만, 또 희한하게 그게 통했다. (어라?) 돌이켜보면 이게 문제였다.


열정페이를 바치는 기분으로 열심히 스토리를 구상하고 혼자서 열심히 그려서 블로그에 올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걸 여기저기에 보여주고 조회수라도 높이고 싶어 주변에 봐달라고 구걸 아닌 구걸을 하자, 지인의 지인의 지인을 통해 제안 비스름한 것들이 들어온 것이 시작이었다. 네이버의 탑작가들을 섭외하기에는 돈이 턱 없이 부족한데 한창 웹툰이 주가를 오르는 흐름은 타야겠고, 그런데 마침 가성비 넘치는 아마추어가 건너 건너 건너에 있다고 하니 한 번 찔러라도 봤을 거다. 어설프게 찌를 던져놓고 공치는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도 소득이 있었다. 어복 있는 초보가 되니 기분이 얼떨떨하면서도 묘하게 흥분됐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처음인 만큼 배운다는 생각으로 돈과 상관없이 열심히 하다 보니 월간으로 정기 연재를 하게 되는 기회도 오게 됐고, 처음으로 그림으로 돈을 버는 게 가능해졌다. 초등학생 때는 화가, 중학생 때는 만화가, 고등학생 때는 디자이너. 막연하게 꿈꿨던 그림 그리는 직업이 나에게도 가능하다는 것을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금액은 중요치 않았다. 내가 그린 그림의 대가로 정기적으로 통장에 기록이 찍힐 때의 희열은 직장생활에서는 받을 수 없는 온전한 나의 것이었다. 이것에 매료됐다.


부족한 생활비는 다른 스케줄 근무로 충당했다. 비록 그림값이 푼돈이었지만 그 자체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때만큼은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기분이었다. '그리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그로 돈을 번다는 이 단순한 흐름에 중독되니 일감도 묘하게 이어졌다. 일은 또 다른 일을 불러오고 이 부서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른 부서에서의 캠페인 의뢰가 들어왔다. 푼돈을 벌어다 주는 일감들이 모이고 모이면서 그렇게 프리랜서로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돈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됐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그림 실력에 속도가 붙었고, 직접 만든 명함을 들고 미팅 자리에서 '나' 하나를 소개하고 어필하는 자리에 설 때마다 내가 정말 뭐라도 되는 사람 같아서 그저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가는 내 커리어에 애착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3년이 지나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몸값인 고료는 처음에 비해 많이 올랐고, 작업 루틴이 몸에 익어서 효율도 올랐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들어오던 '일감' 만큼은 이상하게 어느 지점 이상으로 오르지 않았다. 하나가 끝나면 하나가 가까스로 이어지는 양상이긴 했지만 미래에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일감에 대한 두려움 덕에 치솟던 자신감은 슬슬 불안감에 눌렸다. 그에 이어 경제적인 타격이 오자 '이건 내 길이 아니었나.'라는 생각과 함께 이 직업 자체를 손에서 놔야 하는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정체기가 찾아온 것이다. 슬럼프도 아니었고 지친 것도 아니었는데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당황했던 순간이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자, 디지털 노마드의 특권인 '한 달 살기'를 마지막으로 장렬히 불태울 계획을 세운 뒤 지난 3년간의 프리랜서 생활을 처음부터 돌이켜봤다. '나는 애초에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거지?' 이 생각을 정리한 것이 지금까지 나열한 부분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아, 나는 그냥 운이 좋았구나.


부끄럽지만 프리랜서로 사는 약 3년간 '제안서' 하나 작성해본 적이 없다. 그런 건 영업 직원이 들고 다니거나 대행사가 광고를 따기 위해 하는 ppt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3년이라는 경력이 쌓일 동안 수동적으로 들어오는 일들만 해봤지 직접 '나'를 광고하고 어필하려는 생각은 해보질 못했다. 못했다기보다는 그래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냥 일이 들어왔었으니까.


태국행을 앞두고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니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 '제안서'부터 시작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그냥 파워포인트를 열고는 태국 체류 일정부터 적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나열했다. 다음에는 내가 태국에서 생활하면서 어떤 웹툰을 제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썼다. 쓰다 보니 스멀스멀 자신감도 붙고 꽤나 그럴싸하게 만들어냈다(고 생각 했다). 경제학과를 나온 값을 여기서 하는구나 싶었다.(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람?)


기대와 걱정이 버무려진 제안서를 관광청, 여행사, 매거진, SNS 페이지 등 태국과 여행에 관련된 12군데가량에 무작정 메일로 보냈다. 결과는? 1건의 무상 제공 동의, 1건의 완곡한 거절 메일, 10건의 무응답. 내 첫 번째 제안서는 이 잔인한 숫자로 처절하게 무너졌다. 당장 돈으로 직결되는 일감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한 덕분에 좌절감은 더했고 녹록지 않은 세상 속에서 아직도 치기 어린 프리랜서는 발전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애써서 만든 제안서인데 거부 당하니 오기가 생기고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나서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어서 답답한 마음에 마케팅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에게 그 부끄러운 제안서를 내밀고 자문을 구했다. (마키아토 한 잔 대접에 자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아니, 이 정도면 잘 만든 거 아니야? 아니면 내 콘텐츠가 그렇게 별로인가? 지금껏 통했는데? 충분히 끌릴만한 제안서 같은데?' 배배 꼬인 내 눈빛은 자문 위원님의 말을 들으면서 불씨가 꺼지고 시선은 한없이 내려갔다. 랩탑 화면으로 보여줬기에 망정이지 제안서가 인쇄된 종이었다면 조목조목 팩트 폭력에 너덜너덜한 걸레가 됐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이 글의 목적이 실패를 통한 고찰인 만큼 모두 낱낱이 기록하여 나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누군가 한 명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자문 속 핵심 내용을 공유한다. (누군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나와 같은 사람도 분명 있을 거라는 믿음에)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내 제안서는 매우 불친절했다. 모든 제안서는 갑이건 을이건 제 위치를 떠나서 '친절해야 한다'가 필수 요소라고 한다. (하물며 을 중의 을인 나 같은 것이 불친절했으니...) 그럼 얼마나 친절해야 하느냐? 이 제안서를 읽는 사람이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세세하게 짜인 제안서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안서를 받은 사람이 여행사 직원이라 치자. 어떤 웹툰 작가가 제안서라면서 이메일을 보냈는데 제안서를 보니 이 웹툰 작가의 이력과 태국에 가서 그 생활을 웹툰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럼 이 여행사 직원은 어떻게 이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지? 이런 예시까지 모두 만들어서 세세하게 제안서에서 제공해야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귀찮지만 필수적인 부분이고 생략하면 그 제안서는 절대 상대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나도 역시 읽씹을 당했다.


이것이 제안서의 기본이라지만 마케팅이라고는 스타벅스 해피아워만 아는 나에게는 무지함의 반증이었다. 이 부분만 성실히 작성해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지인의 지적에 (이것 말고도 고쳐야 할 것은 김밥 속 쌀알만큼 많았지만 가장 키포인트에서 실패했기에...) 냉정한 세상에 대한 원망은 무지한 나 자신에 대한 한숨으로 가득 찼다.


또 한 번의 실패를 기록한 제안서는 허튼짓이었을까? 그 자체로는 그랬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 아니던가. 일은 또 묘하게 흘러갔다. 제안서를 보고 이메일을 긍정적인 답신을 해준 귀하신(!) 한 분은 여행 관련 SNS 페이지 측이었는데, 페이지에 정기적으로 노출을 해주는 조건으로 웹툰 무상 제공을 원했다. 나에게도 홍보가 될 수 있는 조건이었기에 월간으로 무상 연재를 하기로 결정했고, 웹툰 콘셉트를 잡기 위해 그 페이지를 관심 있게 살펴봤다. 그러다 눈에 띄는 이벤트를 발견했는데, 한 업체에서 판매하는 생활용품을 여행지에 가져가서 후기를 남기는 조건으로 1등 당첨자에게는 100만 원의 여행 지원금이 제공된다는 글이었다. 신청 방법도 여행 일정과 후기 계획을 답글에 작성만 하면 되는 간단한 과정이었기에 밑져야 본전으로 웹툰 후기를 만들어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작성해서 이벤트에 응모했다. 결과는? 1등 3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당첨 결과에 육성으로 튀어나온 말.


와 진짜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덜컥 태국 체류 지원금을 받게 됐다. 무작정 태국 항공권을 결제해놓고 가족들에게는 웹툰 제작 지원을 받아 한 달 살기를 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거짓말이 아니게 됐다. 제안서는 분명 실패했다. 그런데 얻고자 했던 결과를 얻었다. 아직은 어복이 남아있었나 보다. 실패를 통해 얻어낸 결과치고는 깔깔한 답답함에 묻혀있던 나에게는 오아시스 같았다.


(매우 식상한 얘기지만) 나는 인생의 선택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믿는다. 모든 과정 속에서도 다양한 선택과 결과들이 거미줄처럼 엮여있기 때문에 끝보다는 시작에 집중한다. 앞뒤 생각 없이 무조건 일을 벌여두고 시작해버리는 내 성격도 이러한 믿음에서 피어나는 것일 게다. 하나의 실패 속에서 한 끗 차이로 또 하나를 얻어냈고, 그렇게 태국 체류 직전 내 발악은 약발이 조금은 먹혔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살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먹히는 동안은 똑같이 이렇게 벌어먹고 살 것 같다.





물론 방콕에서의 한 달은 또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일을 벌일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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