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으면 된다 구태여 네 마음을 괴롭히지 말거라 부는 바람이 예뻐 그 눈부심에 웃던 네가 아니었니
받아들이면 된다 지는 해를 깨우려 노력하지 말거라 너는 달빛에 더 아름답다
<너에게> 서혜진
모든 이가 같은 순간에 빛나지 않는다는 명제를 사랑한다. 도시도 이와 같아서 모든 도시가 낮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어떤 도시는 밤에 더 빛난다. 스페인 살라망카가 그렇다.
수도 마드리드에서 포르투갈이 있는 서쪽 방향으로 두 시간 반 정도 달리면 살라망카를 만난다. 우버도 운행하지 않는 도시인 살라망카의 사람들은 어디를 가기 위해 30분을 걸어야 한다고 하면 '그렇게나 오래?'라고 반문한다. 대개는 시내에서 20분 거리에 모든 게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작은 도시이지만 이곳에서 유럽과 스페인의 많은 역사가 시작되었다.
스페인어와 신대륙 항해의 시작점
살라망카에는 지난 2018년 개교 800주년을 맞은 국립대학교가 있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다. 첫 스페인어 문법책(1492년 출판)을 펴낸 학자 안토니오 네브리하가 이 대학에서 수학했다. 가장 정확한 스페인어 발음을 구사하는 지역이라 하여 지금도 많은 유학생들이 찾는 도시인 살라망카는 '스페인어의 요람'이라는 별명이 있다.
한편, 전 세계의 역사를 바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왕들에게 신대륙 항해 계획을 반려당한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들의 경제적 후원을 기대하며 살라망카로 왔다. 그곳에서 이사벨 여왕과 친분이 있던 도미니코회 수도사를 알게 되고 수도원에 기거하며 이사벨 여왕을 직접 알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이사벨 여왕을 설득한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신대륙 항해에 나섰고 같은 해 10월 12일 카리브해의 섬들에 도착했다. 세계의 역사가 바뀌던 날이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도운 성 에스테반 수도원의 외부와 내부 모습
기다리고 있어요 마요르 광장에서
살라망카는 긴 역사만큼 재밌는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도시이다. 살라망카에 위치한 마요르 광장은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요르 광장으로 손꼽힌다. 이 마요르 광장의 아치 위 둥근 석판에는 스페인의 역사적인 인물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역대 왕부터 앞서 말한 콜럼버스에 이르기까지 주요 위인들의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광장 가운데에서 시계가 있는 면을 보고 섰을 때 우측 아치의 첫 번째 석판은 비어있다. 이 자리에는 원래 독재자 프랑코의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하도 사람들이 그 얼굴에 오물이나 페인트를 뿌려서 훼손하는 바람에 여러 번 보수를 반복하다 결국 빈자리로 남겨 두었다. 왼편 아치 위에는 빈자리들이 더욱 많다. 앞으로 스페인에 등장할 새로운 역사적 인물을 기다리는 석판이다. 찾아보면 충분히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인물들이 많을 텐데 미래를 누군가를 기다리며 미완성으로 남겨둔 게 어쩐지 더 근사하다.
세르반테스 얼굴이 조각된 석판(우) | 아직 주인공을 기다리는 석판(좌)
이 마요르 광장에서 기다리는 건 미래의 누군가만은 아니다. 도시 가장 중심에 있다 보니 마요르 광장의 시계 밑은 오랜 기간 살라망카 사람들의 기다림의 장소였다. 살라망카 사람들은 항상 '그 시계 (el reloj 엘 렐로흐)'에서 보자는 말로 약속을 잡는데 그 시계는 다시 묻지 않아도 늘 이곳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인 10여 년전에는 더욱 사람들로 북적였다. 급할 게 없는 작은 도시이다 보니 어련히 오겠지 싶어 삼십 분도 묵묵히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기다리다 보면 아는 얼굴들 한두 개는 또 마주치는 게 작은 도시의 삶이라 그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약속한 이가 도착해 있고 그랬다.
정말 조개 밑에는 보물이 있을까?
걷다 보면 마주치는 또 하나의 독특한 건물이 있다. 조개껍데기 장식이 가득 붙어 있는 '조개의 집'이다. 현재는 공공도서관으로사용 중인 이 건물의 벽은 약 300개의 조개로 장식되어 있다. 15세기 후반 교수이자 기사단 일원이었던 말도나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여기에도 재밌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바로 저 수많은 조개껍데기 중 한 개를 뒤집어 보면 엄청난 보물이 있다는 것이다. 살라망카에서는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 조개를 하나하나 깨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앞으로도 수백 년 간 밝혀지긴 어려울 듯하다.
정말 저 조개 안에는 보물이 있을까?
숨은 우주인과 개구리 찾기
살라망카에 가면 다들 숨은 보물 찾기처럼 우주인과 개구리를 찾아 헤맨다. 우주인 조각은 누에바 성당 한쪽 벽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지어진 이 성당에 옛사람들이 미래를 예언해 새긴 장식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실은 1993년 성당을 보수하며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으로 슬쩍 끼어 넣은 장식이다. 그렇게 들으면 조금 김 빠지는 이야기 같지만 오래된 성당에 장식된 우주인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결코 작지는 않다.
살라망카 누에바 성당의 우주인 장식(좌) | 해골 위 개구리(우)
개구리는 살라망카 대학교의 한 건물 파사드에 있다. 이 파사드에는 성년이 되지 못한 채 죽은 가톨릭부부왕의 세 자식을 상징하는 해골이 세 개 있다. 그중 한 해골 위에는 개구리 장식이 붙어 있는데 왜 하필 개구리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개구리가 유명한 건 그 자체의 의미보다도 이 개구리를 스스로 찾아내는 사람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다는 미신 덕분이다.
사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이 개구리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크기도 매우 작은 데다가 세월의 풍파를 겪은 까닭에 그 모양 또한 그다지 개구리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어코 개구리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끈기와 집중력이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그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