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루나 Jun 29. 2023

뭘 해도 다 이룰 수 있는 시간, 10년

한국 소녀의 스페인 수능 수석 소식에 부쳐

이십 대 중반,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사랑니도 뽑을 겸 치과치료를 받고 있을 때였다. 이전에는 몰랐었지만 사랑니 발치를 해주는 치과는 의외로 별로 없다. 이미 동네 한 치과에서 거절당한 뒤 찾아간 다른 치과는 여자 의사가 있는 곳이었다. 매복되어 있던 아래 치아들을 포함해 사랑니 4개를 2회에 걸쳐 모두 발치하는 시술이었고, 중간중간 실밥도 풀러 가야 했다. 게다가 마취를 하고 발치 준비를 하는 동안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십 대 중반이었던 내 눈에 당시 그녀는 꽤나 어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지금 내 나이쯤, 그러니까 삼십 대 후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대부분 시시콜콜한 이야기였어서 이젠 잘 기억나진 않지만 하나의 대화는 선명히 기억이 난다.


"루나 씨는 10년이라는 시간이 어떤 거 같아요?"


그녀는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긴 계획을 세우며 사는 성향도, 10년 뒤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편도 아니기에 선뜻 어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내 대답은 원래 기다리지도 않았다는 듯이 그녀는 작은 틈만 주고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루나 씨, 10년이라는 시간은 뭘 해도 다 이룰 수 있는 시간이에요."


뒤에 이어진 대화에 대한 기억은 옅어졌다. 그녀의 지난 10년이나, 앞으로의 10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갑자기 꺼낸 저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사랑니가 아프지도 않았는데 내 발로 사랑니를 뽑으러 간 이유가 이제 곧 외국으로 가서 살게 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했었기에, 막연히 앞으로 외국 가서 10년 간 잘 살아보라는 이야기인가, 이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최근 스페인 주요 신문과 뉴스에 일제히 한 한국 소녀의 인터뷰가 실렸다. 얼마 전 있었던 스페인 대학입학능력시험, 즉 수능에서 한국 이민자 출신의 소녀가 마드리드 주 전체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소녀는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고 선택과목이었던 프랑스어에서만 약간 모자란 점수를 받아 종합점수 총 14점 만점에 13.65 점을 기록하며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8세에 스페인어를 하나도 모르는 채 부모님을 따라 스페인에 이민 온 이 소녀는 꼭 10년 만에 '스페인 수능 마드리드 수석'으로 언론을 장식했다.

'10년 만에 이룬 쾌거'
'스페인어를 단 한마디도 못 하던 이민자 자녀, 10년 만에 수능 수석 차지'
'맨땅에서 수석까지, 10년의 성과'

이런 헤드라인들이 스페인 언론을 장식했다.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소녀의 인터뷰와 기사를 보며 꼭 같은 한국인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한 어른으로서 굉장히 기특하고 벅찬 마음이 들었다. 어린아이가 낯선 땅에서 적응하고 살기만도 힘들었을 텐데 새로운 언어를 익히고, 한국 못지않게 은근 극성인 스페인에서 특별히 학군이 뛰어나지 않은 동네의 공립학교를 다니며 수석을 따냈다는 게 내 일 마냥 기뻤다. 아이가 또래보다 더 앳되어 보인 것도 있었지만 스스로도 굉장히 고무되어 인터뷰하는 게 무척 귀여웠고, 그 와중에도 '나는 원래 실수가 잦은 편이라 실수를 줄이도록 노력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도움을 주셨다' '(스페인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내 스페인어는 내 친구들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 노력했다'라고 말하는 겸손함은 소녀보다 (나이만) 어른인 내가 봐도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을 정도이다'라는 한 스페인 사람의 댓글에 무한 공감하며, 보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인터뷰 영상이었다.

그렇게 한참 엄마 미소를 지으며 뉴스와 인터뷰를 보다 눈에 들어온 글자가 있었다. 10년. 그리고 문득 이십 대 중반에 사랑니를 발치하며 치과의사와 나누었던 그날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10년이라는 시간은 뭘 해도 다 이룰 수 있는 시간이에요."


이제야  말의 의미를 새삼 다시 들여다본다. 한 한국 소녀의 스페인 수능 수석 소식을 들었을 땐, 단지 기특한 마음만 있었는데, 그 시간을 10년으로 압축해 보니 10년이면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가 이곳에 와서 공부를 해 수능 수석이 될 수 있는, 그래서 원하는 꿈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아마 그 소녀처음부터 '10년 뒤에는 수능 수석을 차지해 언론에 나와야지'라는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성실히 보낸 하루하루가 쌓여 10년이 되었고 멋진 오늘과 만났을 게다.




나의 하루는 로는 무료하고 때로는 길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꾸준히 운동을 하는데도 몸매는 크게 좋아지지 않는 것 같고, 아직도 모르는 스페인어 단어들과 마주할 때는 허탈한 마음마저 들기도 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객관적으로 여러 면에서 나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대단한 변화는 아닌 것 같. 그러나 바꿀 수 없는 과거의 10년 보다 앞으로 맞이할 10년에 기대해 보기로 한다. 뭘 해도 다 이룰 수 있는 시간. 그리고 그걸 보여준 한 소녀. 소녀의 지난 10년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며 '필요한 곳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향해 나아갈 소녀의 다가올 10년도 응원한다. 그리고 그 응원만큼 큰 애정과 기대를 또한 나의 10년에도 둘 테다. 어떤 날들에잠시 지치고 넘어지더라도 끝내는 일어나 빛나는 10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오늘 하루이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스페인에서 아줌마라고 부르면 생기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