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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ul 03. 2023

까미노, 너의 색은 파랑

까미노 블루

작년 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를 걸으며 놀랐던 것 중 하나는 그곳에서 만난 많은 이들이 이미 여러 번 순례를 했었다는 사실이었다. 여건 상 루트를 여러 구간으로 나누어 걷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종착지인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걷고 나서도 또다시 길을 찾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전에 걸었던 것과는 다른 루트를 선택한 순례자도 있었고, 이미 걸었던 루트를 또다시 걷는 이도 있었으며 심지어 20년 넘게 프랑스 길을 계속 왕복해서 걷는 중인 이도 만났다. 길을 다 걷고도 길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까미노 블루(camino blue)에 빠진 이들이다.


푸엔떼 라 레이나 마을을 나설 때 푸르스름하던 새벽  (c) 이루나


까미노 블루는 슬픔과 우울을 상징하는 블루에 까미노를 합성한 말로 까미노를 걷고 난 뒤에도 자꾸 순례길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현상을 뜻한다.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곳은 순례를 떠나기 전, 정보 수집차 가입한 한국인 순례자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보통 여행 커뮤니티에선 떠나기 전 준비하는 사람들의 정보교류가 활발한데 반해, 그곳은 어째 다녀온 사람들로 더 북적이는 듯했다. 까미노를 곱씹고 기억하고 또 초보 순례자들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했다. 그 정보의 질도 어찌나 상세하고 좋은지, 스페인에 10년 넘게 산 나도 처음 접하는 꿀팁들이 넘쳐났다. 좋은 의미로 '까미노 고인물'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까미노 블루 중증 증상자들이었다. 누군가 곧 순례를 시작한다며 조언을 구하는 글을 쓰면, 조언 끝에 곧 길에 오를 이에 대한 부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아! 곧 떠나신다니 너무 부럽습니다. 저도 다시 갈 날을 기다립니다!"


이런 탄식이 글마다 넘쳤다. 그리고 상당수가 정말 순례길로 돌아왔다. 시간도 거리도 적지 않게 소요되는 스페인까지  다시 오고 아예 관련된 분야로 직업을 바꾼 이도 있었다. 심지어 서울에는 순례자 부부가 오픈한, 까미노에서 많이 접하는 숙소 명칭인 '알베르게'라는 이름의 카페까지 있다. 그곳에서는 까미노의 상징인 조개 모양이 장식된 디저트와 스페인식 진한 라떼인 꼬르따도(cortado)를 팔고 순례자 모임과 문화 활동을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그런데 까미노에 진심인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데 마냥 신기해하기만 했지, 내가 바로 그 까미노 블루 환자가 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순례길 위에서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걷는 내내 어서 순례자 옷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컸었고 그 마음만큼 순례가 끝났을 땐 홀가분했었다. 게다가 순례 중간에 더 이상 못하겠다고 마드리드 집으로 도망치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아마 계속 걷고 있던 친구들이 없었더라면 나의 순례는 그때 끝나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이 원래 그렇듯, 정말 이유 없이 불현듯 내게도  까미노 블루가 찾아왔다. 한 달 전부터 갑자기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더니 급기야 다시 순례자 커뮤니티에 들어가고, SNS에서 지금 걷고 있는 이들의 사진들을 찾아보다가, 순례자 오픈 단톡방까지 가입했다. 예전에는 의아하게 보았던 그 탄식을 마음속으로 외치며.


"아! 지금 걷고 계시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산티아고 도착하던 날 아침의 블루도 기억하지 (c) 이루나


살면서 그리운 게 어디 한둘일까. 멀어진 인연, 흘러가버린 시간, 사라져 버린 것들, 모든 게 그리움이다. 언젠가는 산다는 게 그리운 것들만 점점 쌓아가는 일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실은 까미노보다 더 그리운 길들도 많다. 오래된 본가 아파트 돌담의 철쭉꽃이 피는 길, 가족과 또 친구들과 걷던 저녁의 탄천가, 스무 살 대학생 시절 집 가는 광역버스가 타기 아쉬워 괜히 해가 질 때까지 홀로 걷곤 했던 종로 5가.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아련해 일부러 외면하고 싶을 만큼 그리운 길들이다. 사는 게 정말 그리움만 더 쌓아가는 일이라면, 닿을 수 있는 그리움들은 좀 더 힘껏 잡아보며 살아도 좋겠다. 비록 더 그리운 길들은 너무나 멀리 있지만 내가 놓아두고 온 까미노는 차로 몇 시간이면 가는 곳에 있다. 그러니 아마 나는 못 걸은 길을 다시 걸으려 곧 떠나게 될 것 같다.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요즘 가장 큰 희망이자 기쁨인 날들이다.


아, 까미노! 너의 색은 파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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