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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Oct 17. 2023

퇴사하러 가는 길

여름이 지나며 차가 많이 늘었다. 원래 바캉스 시즌에는 마드리드 도로가 텅텅 비었다가 9월이 가까워질수록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 때문에 차가 많이 늘기는 하지만 올 가을에는 유독 차가 많아진 느낌이었다. 늘 여유롭게 회사에 도착하던 시간에 집에서 나와도 아슬아슬하게 회사에 도착하기 일쑤였다. 다른 차들끼리 조그만 접촉사고라도 있는 날에는 (거의 항상 있다) 지각도 한두 번 했다. 하루는 긴 정체 끝에 겨우 회사에 도착해 "스페인 경제가 매우 좋아지는 거 같아. 차가 많아 진걸 보니 근로자가 늘었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인 스페인에서는 시즌별로 근로자수 변동폭이 큰 편이다. 적법한 고용이라면 국가에 사회보장세를 개인과 회사에서 납부해야 하니 보통 이에 가입된 사람들 수를 통계로 근로자수를 가늠하는데, 휴가 시즌이 되면 호텔, 요식업계 종사자가 일시적으로 늘어나고 9월에는 학교들이 시작하니 교육계 종사자가 늘어난다. 올해도 어김없이 비슷한 내용의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근로자수가 조금 늘었고, 특히 여름이 끝나며 교육계 종사자 수가 늘었다는 소식이다.


이렇게 더 많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고용시장에 유입되고 여름내 충전한 에너지를 쏟아부으려는 때, 나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0월의 어느 날, 마지막 출근길을 달리고 있었다.




삶에서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어떤 하루들이 있다. 내겐 작년 봄 어떤 금요일이 그랬다. 이른 봄이었지만 햇살이 포근하던 오후였다. 스페인에 와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운전면허증이 만료되어 갱신을 위해 적성검사소를 갔고, 아직 예약시간이 되지 않아 건물 밖 벤치에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그때 난 다시 회사원이 되냐 마냐의 기로에 있었다. 몇 년 전 오래 다녔던 회사를 그만둘 당시, 다시는 회사에 다니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만두었었다. 그 후 가끔씩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때면 그 결심을 번복하며 잠깐잠깐 회사에 다니긴 했지만 모두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끔 돌아갔던 회사생활에서조차 내가 왜 회사를 다니고 싶지 않았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들을 목도했기에, 더더욱 회사를 오래, 꾸준히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고 어떤 다른 방안이 있는 건 또 아니었다. 그러니 어쩌면 그 봄은 또 내가 길을 잃었던 때였는지도 모른다.


금요일 퇴근 시간 무렵이었기에 벤치에서 바라본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차들만큼이나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차창 너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정말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퇴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았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운전을 하고 일을 하는구나!'


내가 두려워하는 일은 전혀 새롭고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도로에 늘 마주치는 사람들이 하는 바로 그 일, 운전을 하고 회사를 다니는 일이었다. 정말 너무 평범해서 뭐 이런 걸 결심하는데 용기까지 필요하나 싶은 그 두 가지가 지난해 봄 내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시는 회사를 다니지 않을 거라는 결심을 깨는 것도, 어쩌면 운전을 평생 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서 벗어하는 것도, 내겐 모두 큰 용기가 필요했다.




후회 없이 지나온 지난 일 년 반이었다. 늘 마음은 대충 일하자, 노느니 일한다며 살고 싶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결국 일에 파묻히고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샘솟는다. 완벽은 존재하지 않고 만족은 주관적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할 수 있는 안에서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시간들이었다. 그동안 지나온 모든 일에서 그랬듯 많이 성장하고 배웠다. 그래서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는 별 아쉬움이 없었다. 당장 자유로워질 시간에 대한 기대가 더 크게 다가왔다.


다만 마지막 출근길을 운전해 가고 있던 아침, 평소에는 성가시게 느껴졌던 도로 위 많은 차들을 보는데 마음이 괜스레 미안해졌다. '운전을 해서 직장에 가는 일'을 하고 있던 그들은 지난해 봄 길을 잃고 두려워하던 내게 용기를 주었던 이들이었다. 두려워 말고 같이 걸어가자고 멈추어 있던 나를 일으켰었다. 그들이 내 길을 대신 걸어준 것도 내가 빨리 걸을 수 있도록 밀어준 건 아니었지만 그저 자신을 길을 걸음으로써 내게 힘을 주었다. 마지막 출근길 도로 위의 많은 차들을 보다 보니 알 수 없는 연민과 연대, 그리고 고마움과 미안한 감정이 뒤엉켜 다가왔다. 뭔가 '다 같이 고생하는데 나만 빠져나간다'는 생각까지 밀려왔다.


나는 도로 위의 차들에게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지지를 보내며 '먼저 쉬어서 미안해요. 다시 곧 돌아와 또 같이 걸을게요'라며 나만의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지난봄, 내게 큰 용기를 주어서 고마웠다는 마음도 함께 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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