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까미노를 걸을 땐 비수기라 그랬는지 한국 순례자를 총 3명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중 2명은 말 그대로 인사만 하고 그 뒤로 보지 못했으니 사실상 만났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그래도 워낙 많은 한국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기에 이 길에서 동양인은 한국인이라는 공식이 거의 통용된다. 동양인인 사람만 보면 다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국인이지?" 하고 묻는다.
한국인 순례자들 중에는 한국인을 별로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는 순례자도 많다. 매번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굳이 먼 곳까지 와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아무래도 동향 사람이다 보니 신상 캐기식의 질문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때때로 장년층 순례자들에게 난데없는 회초리 발언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퇴사하고 뭐 할 거야? 결혼은 왜 안 했어? 나이도 어린데 여기 와서 뭘 얻어갈 셈이야? 등등)
생각해 보면 나도 매번 접하는 언어와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스페인 국외여행을 좋아한다. 딱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니 쓸데없는 소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가벼운 주제의 대화는 마음에 부담이 생기지 않아 마치 작은 놀이같이 즐겁다. 한국인 순례자들 중에는 한국에서 느낀 소음과 복잡한 인간관계를 피해 온 이들도 적지 않을 텐데 여기서 처음 만난 동향의 순례자에게 불필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강요당하거나 회초리 발언을 듣는다면 충분히 불쾌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한국인이지만 외국에 오래 살고 있기 때문인지 한국인들을 보면 반갑고 말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좀 더 크다. 대체로 한국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결국 안 하게 되지만 특히 까미노에서 한국 순례자들에겐 목례라도 하고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역시 생각보다 눈 마주치기가 어려워 쉽게 기회가 오진 않는다. 어쩌다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상대도 역시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 하여 하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는 걸 어떤 경우에선 실례라고 느끼는 듯하다.
어찌 되었건 지난해 한국 순례자들을 거의 보지 못해서 그랬는지 올해는 종종 마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성수기는 한풀 꺾였다 하여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오늘 머무는 숙소에는 무려 한국인 30명 단체팀이 있다. 개인적으로 걷고 있는 한국 순례자들도 여럿 포함이다. 사실 어제 프로미스타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게임의 NPC처럼 어디선가 한 한국 아주머니가 튀어나와 내게 "여기 숙소 어딨 어요?"라고 묻길래 혼자 오신 거냐 여쭤보니 단체팀으로 왔다 해 오늘 같은 마을에 머물겠구나 했는데 같은 숙소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단체팀은 인원이 많고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팀으로 엮인 것이다 보니 한국인을 보면 으레 같은 팀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자꾸 나에게 너무 당연한 듯 이것저것 물어봐서 벌써 단체 순례객 여러 명에게 방과 화장실과 욕실을 안내해 주었다. 물론 나도 단체팀 인솔자의 안내에 따라 방과 빨래방과 주방을 안내받기도 했다.
자꾸만 어디선가 NPC처럼 나타나는 한국 순례객들에게 욕실을 알려주고 나니 괜히 이 상황이 재밌어 웃음이 났다. 사실 단체가 있으면 내 침대 확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에 꺼려지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작년에 못 본 한국인 순례자들을 잔뜩 볼 거라 생각하니 이상하게 은근히 기대가 된다.
오늘은 친정과 가까운데 사시고 딸이 내 대학 후배인 한국인 부부 순례객을 만나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느라 쉬지도 않고 16km를 단숨에 와버렸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고작 정오 무렵이다. 이렇게 일찍 도착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내일은 또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될까 기대하며 너무 일찍 끝나버린 하루 일정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