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무비패스 #13
서울에서 발렛 파킹과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살아가는 학수(박정민)는 랩퍼라는 꿈이 있다. <쇼미더머니>에 6년 연속 개근을 할 정도로 열정이 있지만 결과는 늘 아쉽게 탈락.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건강이 안 좋다는 전화를 받고 고향인 변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선미(김고은)를 만나고 자신의 옛 시절에 대한 기억들과 마주한다. 빨리 고향을 벗어나 다시 서울로 가고 싶은 학수. 하지만 여러 사건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각자의 꿈을 좇으며 나름대로의 스웩을 갖고 살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집안 분위기, 친구들, 사는 동네, 받은 교육, 접했던 문화, 여자 친구 등. 하지만 내가 외부의 영향을 받을 때마다 그 순간이나 인과관계를 다 기억하지는 못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만들어진 거니까. 그 시기에 그런 요인들이 있었고 그 요인들이 조금씩 쌓여 나라는 존재가 완성되는 거다. 나의 어떤 특징들, 남과 다른 성격들, 개인적인 성향 등은 아침처럼 당연하게 온 게 아니다. 과거의 경험들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변산>의 접근 방식은 좋다. 각자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살고 있지만 그들의 과거, 그들의 본모습을 '고향'이나 '성장 배경'을 통해 그려내는 건 납득이 가는 방향이니까. 그 사람이 지금의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된 이유나 어떤 생각을 하게 된 원인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너무 많은 원인과 이유를 담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버지와의 갈등, 초등학교 친구들과의 에피소드, 고등학교 때의 첫 사랑, 어머니의 죽음, 친구들과의 관계 등 우리가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해줘야 할 부분이 꽤나 많다.
나이가 더 많은 인물이었다면 어땠을까? 더 많은 사연이 있었을까? 그보다는 서울에서 살면서 자신을 변화시킨 또 다른 요인들도 많아졌을 테니 고향이라는 토양에 기대기도 어려웠을 거다. 고향에서 20년을 살아도 타지에서 20년을 살면 고향의 특징을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청춘을 대상으로 한 건 동의가 된다. 우리나라의 청춘들이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시기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영화 속 인물과 고향은 그 그림이 제법 잘 맞춰지는 셈이다.
스스로 기억하는 지난 모습도 많겠지만 우리는 의외의 사람에게서 나의 옛날 이야기를 듣곤 한다. "내가 그랬어?" 하는 식의 어색함도 있지만 남의 눈을 통해 객관적으로 그려지는 과거의 모습은 나를 돌아볼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같은 기억도 누가 하느냐에 따르고 누군가는 내가 간과하는 어떤 모습에 대해 나보다 더 정확한 시점이나 깊이 있는 통찰을 할 때도 있으니까. 그런 기억들과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내가 그랬어?"에서 "내가 그랬구나"로 생각이 달라지는 거다.
<변산>은 그런 의도를 갖고 있음에도 그걸 잘 활용하지 못한다. 그저 과거의 에피소드를 나열하거나 인물의 갈등 관계를 설명하는 플래시백 정도로 쓸 뿐이다. 과거의 내 모습, 잊고 있었던 지난 시간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인과관계의 에피소드로만 활용한다. 여기에는 이준익 감독의 단순한 연출도 한몫을 한다. 주제 의식을 갖고 한 방향만 보고 전진하는 뚝심은 인정하지만, 그 과정에서 풍부한 이야기나 감정을 담아내지는 못 한다. 줄거리와 사건은 있지만 전개에만 급급하다.
아쉬운 점은 그런 부분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모든 컷에서 대사나 상황이 나온다. 필요한 장면만을 찍는다는 얘기다. 물론 불필요한 장면을 넣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필요'의 기준이 조금 다르다. 관객에게 맡기거나 의미를 해석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정보 전달이나 내용 전달만을 '필요'로 규정한 것이다. 상황이나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판단을 맡기거나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줄 필요가 있다. 모든 장면에서 사건을 전개하는 대사가 나오고, 모든 장면에서 인물과의 관계가 설명되고, 모든 장면에 특정한 액션이 들어간다면 이야기의 나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영화적인 재미가 반감된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관객은 일방적인 주입보다 공감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소통이 필요한 부분이다.
반대로 그런 연출 덕분에 이야기의 의도는 명확해진다. 인물과의 관계도 단순화되고 사건의 전개 방향도 정직하다. 배우들은 캐릭터로서 해야 할 일에 충실하고 중간중간 재미있는 장면들도 나온다. 대중 영화로서는 가볍게 즐기기 좋은 면이 있다. <변산>이 여러 이야기를 다룸에도 무리 없이 줄거리를 따라갈 수 있는 이유도 이런 부분이다. 입체적인 면보다는 평면적인 면이 강해 의도를 정확하게 하고 이야기 전달에 힘을 쏟지만, 개인적으로는 에피소드를 좀 줄이더라도 주제에 좀 더 깊게 들어갔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뭐 이건 관점의 차이니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영화에서 주요 전달 매개로 등장하는 랩은 이 시대의 시다. 가사만 음미하자면 상당히 심층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들이 담겨 있다. 랩퍼가 된 학수에게 선미가 "너는 시인이 될 줄 알았다"라고 하는 것도 당연한 반응일 거다. 시를 읊듯 랩을 하는 학수, 중간중간 나오는 랩은 <변산>을 마치 랩으로 하는 뮤지컬 영화처럼 보이게 한다.
(사진 제공 :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