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무비패스 #16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플로렌스(시얼샤 로넌)와 에드워드(빌리 하울)는 체실 비치의 한 호텔에서 그들의 첫날밤을 준비한다. 연애하는 동안 서로만 바라보고 듬뿍 사랑을 쏟았던 두 사람이지만, 첫 관계에서는 긴장감과 서투름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방을 뛰쳐나가는 플로렌스. 플로렌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에드워드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부담과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 실망한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런 플로렌스에게 자존심이 상하고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 지 6시간 만에 헤어지고 만다.
영화의 구성은 단조롭다. 막 결혼식을 마친 남녀가 호텔 방에서 첫날밤을 보내기 직전 상황에서 서로의 과거 이야기가 플래시백으로 등장한다. 둘은 앞으로 겪을 일에 온 신경이 맞춰져 정신이 없다. 아무 말 대잔치를 하기도 하고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긴장한 빛이 역력하다. 사소한 감정 표현, 의미 없는 말 하나에도 온 신경이 곤두서 있다. 사실 지금 뭘 하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곧 있을 첫 관계 외에는 머리 속에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둘이 느끼는 첫 관계는 낭만적이거나 로맨틱하진 않다. 긴장은 물론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다.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두 사람은 지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각자의 가정환경, 첫 만남, 데이트, 서로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등. 그런 이야기들로 스스로 첫 관계를 치를 완벽한 준비가 됐다고 계속 되뇐다. 떨지 말기를 두려워하지 말기를 그리고 상대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두 사람은 꽤나 다른 성장 배경을 지니고 있다. 시골의 소박한 집에서 자란 에드워드는 역사에 관심이 많고, 공장을 하는 아버지 덕에 시내에서 풍족하게 성장한 플로렌스는 음악에 조예가 깊다. 특히 에드워드의 어머니는 사고로 정신이 온전하지 않고, 가족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반면 플로렌스는 여유로운 형편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특권 의식이 강한 어머니가 문제이긴 하지만 플로렌스는 핵무기 반대 집회에 나가고 4중주 악단을 리드하는 등 진취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인물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에 끌렸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시골 출신으로 촌뜨기 감성이 물씬 풍기는 에드워드는 플로렌스를 사랑한다. 그녀의 배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봐주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끌렸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어머니와 잔정이 없는 두 동생과도 잘 지내는 모습에서 호감을 느꼈다.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의 꾸밈없고 솔직한 모습에 끌린다. 뭔가 어설프고 촌스럽지만 자기와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 좋다. 그래서 더 잘 하고 싶다. 사랑도, 결혼도, 섹스도.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 글로 섹스를 배우기도 한다. 뭐든 에드워드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다.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어설펐다. 경험이 없다 보니 마음만 앞섰다. 더 잘 해주고 싶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고, 자기 마음을 더 보여주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첫 섹스가 모든 걸 망쳤다. 아니, 첫 섹스에 대한 부담감이 모든 걸 망쳤다. 두 사람은 관계에 실패했고, 놀란 플로렌스는 호텔을 나와 체실 비치로 도망친다. 에드워드는 감정을 추스르고 플로렌스를 따라가지만 "처음이니 괜찮아. 나아질 거야" 한 마디를 못 하고 자신에게 왜 모욕감을 줬냐며 화만 낸다. 서로 너무 사랑했고, 서로의 기대에 너무 부응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겁부터 났다. 피하고만 싶었다. 그렇게 둘은 결혼 6시간 만에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심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잘 몰라서 화부터 냈던 마음을 다시 주워 담지 못하고, 두려워 피하고 싶었던 마음도 되돌리지 못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에드워드는 잘 사는 플로렌스가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해주는 것들이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플로렌스의 아버지로부터 직장을 얻고, 살 집을 마련하고, 결혼 비용도 받는다.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의 시골집으로 와서 가족들과 잘 지낸다. 에드워드는 자신을 사랑해서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섹스가 잘 안 된 후에 서로에게 모진 말을 하는 데에는 그런 마음의 짐이 깔려 있다.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만 섹스라는 원초적인 행동에서만큼은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던 걸까? 그보다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스러운 마음에 안 좋은 말과 표현이 나온 걸 거다. 자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상대를 할퀴는 생각을 하고 만 거다. 상대를 사랑하지만 표현은 달랐다. 아니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다.
플로렌스는 사랑밖에 몰랐다. 자신의 배경이나 환경이 에드워드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에드워드의 가족들에게도 헌신했고, 이해와 배려로 에드워드와도 잘 지내고 싶었다. 다른 남자의 유혹에 완벽하게 철벽을 치며 에드워드만 생각했다. 그래서 더 잘 하고 싶었다.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섹스는 무서웠다.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잘 해낼지 걱정이 앞섰고 마음대로 되지 않자 미안한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잘 해줘야 하는데, 에드워드가 원하는 것을 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그래서 섹스는 다른 사람이랑 하고 자기와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자는 마음에 없는 말까지 해버리고 만다. 그게 에드워드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사랑하지만 자신이 만족스럽게 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너무 어렸다. 감정이나 마음만 앞섰지 경험이 없었다. 젊었을 때의 경험 부족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같이 얘기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며 경험을 만들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둘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상대를 실망시킬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렇게 보일까 봐 화를 내기도 했고, 사랑하는 마음과 다른 행동이나 결과가 나오면 상대가 실망할까 스스로 자책했다. 자신의 사랑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억울하고, 그 억울함이 잘못 표현되는 것도 견디기 어렵다. 감정만 앞서는 시기에는 그 넘치는 마음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서 애가 타기 마련이다. 하지만 경험치가 쌓이고, 상대를 헤어릴 줄 아는 여유가 생기고, 마음을 잘 표현하는 요령이 생기고, 또 그 사람의 말의 속뜻을 알아차리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다. 함께 하는 시간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체실 비치에서 결혼한 지 6시간 만에 헤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가 오랫동안 담아내는 걸 보여준다. 돌아선 에드워드 뒤로 플로렌스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카메라가 화각을 넓히며 담는다. 플로렌스를 프레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최대한 두 사람을 프레임의 양 끝에 위치시킨다. 마치 아직 시간이 있다고, 프레임 밖으로 플로렌스가 빠져나가기 전에 돌아서서 잡으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에드워드는 뒤로 돌지 않는다. 플로렌스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서로가 싫었다기보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거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모여 인생을 만든다. 잘못된 판단, 격한 감정, 모진 말 한마디가 인생의 변곡점에 큰 영향을 준다.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시얼샤 로넌은 이제 미국 독립 영화계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됐다. 어떠한 역할에도 무리 없이 녹아들며 작은 감정이나 사소한 상황을 잘 묘사해낸다. 큰 영화가 다루는 큰 흐름보다 작은 영화가 다루는 디테일을 더 잘 소화하는 배우가 됐다. 계속 작은 영화만 하라는 건 아니지만 더 많은 작은 영화들 속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길 바란다. 배우로서 정말 잘 커줬다.
두 사람이 결혼 전에 섹스를 했다면 극단적인 선택은 피할 수 있었을까? 최소한 이런 일을 먼저 겪었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늦췄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거다. 이건 단순히 섹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잘 하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나온 결과니까. 하지만 경험치가 더 쌓였다면 좋은 해결책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의 경험의 동물이잖은가. 겪어보고 부딪하고 수정하고.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도, 나중에 후회를 한다고 해도 그것조차 경험이 될 테니까.
(사진 제공 :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