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란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내가 짜증을 내도, 화를 내도 다 받아주셨으니까.
심지어 동생들과 과자를 나눠주셨을때도 차별을 하셨다. 나는 새우깡 한봉지, 동생들은 한봉지로 둘이서
나눠먹게끔 그렇게 두봉지만 사셨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였기에 내가 할머니에게 동생들을 그만 때리시라고
말씀만 드렸어도 할머니는 멈추셨을까?
하지만 나 역시도 할머니가 무서웠다. 그런 말씀을 드렸다간 나도 동생들과 똑같이 맞을 것만 같았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저 방관이었다.
엄마의 기억은 희미해 졌지만 엄마와의 약속은 아직 유효하다고 믿었기에 나는 그저 이 지옥같은 집에서 빨리 나갈수 있는 방법은 내가 공부를 잘 하는 것 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엄마는 결국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둘째를 낳고 문득 친엄마 생각이 나서 아빠를 통해 한번 만난적이 있다.
그때 친엄마가 그러셨다.
'너희들 그렇게 아빠랑 할머니한테 맡기고 돈벌고 자리잡아서 내가 데리러 가려고 했어.. 생떼같은 새끼들
떼놓고 어떻게 사니.. 너도 애기 낳아보니 자식 떼놓고 못살겠지? 엄마도 처음엔 그랬어.. 근데 니들 외할머니가
그러시드라 자식떼놓고도 다 산다고. 아직 젊은게 새끼를 셋이나 데리고 혼자 어떻게 살거냐고.. 외할머니고
이모들이고 다 말려서.. 어쩔 수 없이 너희들 데리러 못갔어..미안하다..'
나는 당시 둘째딸이 너무 예뻐 어쩔 줄 몰랐을 때라, 솔직히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지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좀 더 커가고 신랑과 사네마네 싸우기도 하는 날이 생기고, 나이가 마흔이 되다보니
이제는 친엄마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엄마 나이 고작 스물 여섯.
애 셋 딸린 이혼녀 소리 듣고 살기엔 너무 한창 나이이지 않은가. 내가 마흔이 되니 엄마의 스물 여섯이
안쓰러웠다.
그래도 엄마, 데리러 온다는 약속은 하지 말지 그랬어. 나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