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Nov 09. 2020

29도씨의 새해

사이판에서 맞이한 새해 다짐 

2020년은 사이판에서 맞이했다. 밤에도 30도 밑으로 겨우 떨어지는 곳. 두 달 동안 닳도록 신고 다닌 쪼리를 끌고 나와 야외에서 카운트다운을 하고 후덥지근한 밤공기에서 샴페인을 마셨다. 그때의 마음을 끄집어내 보며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해보려고 한다 (조금 빠르지만 난 원래 설레발치는 것을 좋아하니까) 

                                                                                                                                                                                                                                                                                                                                                                                                                                                               

2019년의 best nine 은 대부분 해외에서 찍혔다. 답은 뭐다? 

 2019년도 참 어려운 해였다. 장애물 달리기를 하듯 허들을 넘고 나면 다음 허들을 목표로 사는 게 가장 익숙했는데, 취업이나 졸업 같은 뚜렷한 목표가 사라지고 잘 지내기, 행복하기 같은 추상적인 것을 소망하다 보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학기가 없는 한 해를 보내고 나니 맺고 끊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삶의 대부분을 회사와 지하철에 헌납한다고 불평하면서도 이 긴 시간의 흐름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 손 놓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꾸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검증하려고 버둥거렸다.


    돌이켜보면 자꾸 답을 찾으려고 해서 외려 방향을 잃은 것 같다. 해가 없는 방정식도 있는 것처럼, 산다는 게 문제를 풀고 답을 구하는 식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그 과정이 다 삶인 건데 순간순간에 충실할 줄 몰랐다. 


     실망하는 게 두려워 기대를 않다 보니 잔뜩 웅크린 채 연말연시를 보낸 지 몇 해가 되었다. 나는 원래 새해라고 특별한 감흥도 소망도 없다고 가면을 쓰면 새해에 바라왔던 대로 내 인생이 풀리지 않아도 괜찮을 줄 알았다. 20대 중반을 점철한 패배주의였다. 이런 지독한 나쁜 생각의 고리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던 두 달 동안 그렇게 살다 보니 꿈꾸는 법도 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것들을 100%는 아니어도 최대한 이루려고 노력하는 일상의 성실함이 모여 내 자존감을 이뤘던 건데 스스로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미 와버린 새해에는 스스로 나를 사랑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주고 싶다. 그럴 여력을 만들려면 쓸모없는 것에 감정 소모하지 말고.  친구를 위로하다가 나였으면 오늘 방에서 내내 울었을 거라고 하자 unworthy 한 일에 우는 게 아니라는 말에 내가 더 위로를 받았다.


  최근 한 2주 정도 갑자기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부담감에 무척 시달렸다. 한국식 나이 체계에 반감도 심할뿐더러 (여기선 난 아직 25살이다) 한 두 살 먹는 것 갖고 너도 이제 꺾였네,  하면서 남의 인생을 후려치는 것엔 정말 더더욱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20살 이후로 나이가 드는 것에 정말 무던했다. 그만큼 지나간 나이가 아쉽지도 않았다. 매 해 새로 세팅한 컴퓨터를 받는 기분이었으니까. 문득 27살이 된다고 하니 남은 20대의 시간이 지나온 그것보다 훨씬 적은 게 확연하게 눈에 보이는 시기인 것 같아서 잠시 조급했다. 한 3년 후에 보면 정말 우습겠지만 이제는 뭔가 거두는 시기인 것 같아서 자꾸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았고 내가 많이 바뀌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조급함은 100세 시대에서 20대가 끝나면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아서가 아니라 멋진 30대를 맞이하고 싶은 기대 해서 기인했다. 30살쯤 되었을 때 꿈꾸는 내 모습을 일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성실히 청사진을 그려야겠구나, 그런 깨달음이 있는 시간이었다. 긍정적인 조급 함이었다. 나이가 더 들어서도 리프레쉬 휴가 때 운동화를 신고 2만보씩 걸어 다닐 수 있게 운동을 열심히 하고, 나이만 헛 먹은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독서 편독도 줄이고, 나 뭐하고 살았지? 하는 허무함에 빠지지 않게 순간순간의 기록에도 충실하고, 할 수 있다면 직장생활 외에도 항상 무언가에 푹 빠져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다시 읽은 <제5 도살장> 속 구절을 되새기며 새해를 맞이한다.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매거진의 이전글 mp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