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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an 31. 2024

스토아 철학의 자연관

(2) 운명의 힘 안에 있는 인간 본성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사물과 사건은 인과법칙의 사슬 속에 있다. 이 사슬을 운명이라고 했으니 세계는 정해진 운명대로 운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 역시 운명의 힘 안에 놓여있다. 


  많은 철학과 종교들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며 추켜세우곤 한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다른 모든 사물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신과 자연 사이를 중재하는 임무를 가진 것이 인간이라고 보았다.


  인간을 신과 자연의 중간자로 보면 인간의 본성은 이중성을 가지게 된다. 자연에 속하는 동물성과 신에 속하는 신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인간이 다른 창조물과 구분되는 본성이라고 본다. 인간의 우월한 본성을 대표하는 신성으로 이성을 꼽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유일하게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이 능력을 발휘하여 자연 속에서 신의 대리자로 자연을 정복한다는 논리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인간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는 도움이 된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자로 지배하고 도구로 이용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인간을 신과 동물 사이를 오가는 지위에 올려놓은 대가로 심한 혼동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 자신이 동물과 같이 자연과 운명의 힘 앞에 무기력한 존재이므로 겸손해야 하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혹은 언제 자신이 신과 같아서 자연과 본능의 제약을 극복하고 신처럼 자연과 운명을 초월하여 개척해 나가는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더 불행한 것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겸손해야 신처럼 오만하고, 신처럼 초월적이어야 동물처럼 본능에 휘둘린다. 이렇게 인간을 신과 동물의 이중성을 갖춘 존재로 파악한 대가로 평생 혼란과 혼동 속에서 살아야 한다. 여기서 인간이 살아가며 겪어야 하는 모든 불행이 비롯된다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은 이런 문제에 해독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불행을 가져오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려면 올바른 이해와 자각이 필요하다. 먼저 자신이 자연과 자연의 인과법칙을 초월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자연 속 모든 사물과 사건 역시 자신과 동일한 존재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자연 속 모든 존재는 인과법칙의 사슬 속에 있다. 그 사슬 속에서 합리적인 운행 원리에 의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고 변화한다.


  좀 더 쉽게 풀어서 생각해 보자. 자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미개인들은 귀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생각에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신을 해치려는 악한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또 다른 초월적 존재나 힘에 의지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서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지하는 어리석음으로 자기 인생을 허비한다.


  현대인은 어떨까? 과학적 자연관을 가지고 있으니 미신을 굳게 믿는 미개인들보다 더 나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현대인조차 자신과 세상에 대한 오해와 혼동 속에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가령 경쟁 사회에서 지나친 상호비교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엄마 친구 아들(딸)'은 일종의 미신이다. 모든 경쟁 대상을 가뿐하게 물리치는 이 완벽한 존재가 과연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존재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허상과 미신 속 존재와 자신을 비교한다. 그런 비교 결과 자신은 보잘것없는 존재다.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지고 어떻게든 엄마 친구 아들(딸)에 근접하기 위해 자신의 피와 뼈를 갈아 넣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SNS에 나오는 행복한 셀럽들의 모습은 또 어떤가? SNS에는 수 억 명이 넘는 사람들 중 가장 찬란하고 행복한 인생의 단면을 담은 사진과 영상이 넘쳐난다. 그런 SNS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그 수많은 행복의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허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허상을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한 행복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SNS 속 귀신은 거의 모든 사람들을 비교의 불행에 빠뜨린다. 


  이런 거짓과 허상으로부터 탈출하려면 정확한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자신과 자연을 발견하고 이해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원래 있는 그대로'가 바로 자연이다. 그 자연을 이해하고 따르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


 세네카의 말을 들어보자.

마음은 전 우주를 돌아보고 높은 곳에서 (대부분이 바다로 덮여 있고 막혀 있으며, 바다가 아닌 곳도 지저분하거나, 바짝 마르거나, 얼어 있는) 대지를 내려다보며 "이 작은 점 안에 그토록 많은 나라가 칼로 불로 나뉜 것인가?"라고 자신에게 말한 다음에야 주랑, 상아로 번쩍이는 천장, 잘 손질된 관목, 저택 쪽으로 향해 만들어진 작은 개울들을 하찮게 여길 수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읽으면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이 쓴 [창백한 푸른 점]이란 책의 내용과 너무 비슷해서 놀라게 한다. 먼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보이저 1호가 지구로부터 61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날아갔다. 이 프로젝트의 화상팀 책임자였던 칼 세이건이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사진을 찍게 했다. 보이저 1호가 찍는 사진은 이제 더 이상 지구로 전송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구에서 촬영할 수 없는 우주 저쪽 멀리를 찍는 것이 우주 연구에 훨씬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지구 쪽을 찍으려는 칼 세이건의 명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칼 세이건은 반대를 무릅쓰고 지구를 찍었다. 그렇게 찍힌 지구의 모습은 아주 작은 먼지와 같은 점에 불과했다. 칼 세이건은 이 사진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좀 길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는 글이므로 인용해 본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 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인류가 이주를 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을 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합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철학자 세네카와 칼 세이건은 수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작은 점'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동일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에 대한 깨달음은 삶의 진실을 여는 열쇠이다.


  자연과 자신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이 열어준 진실의 공간에는 거짓과 허위의 장식과 치장을 벗은 정직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인과법칙과 운명의 힘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의 모습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 굴레 속에는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만한 기회의 공간이 주어져있다. 벗을 수 없는 운명을 거짓으로 벗는 환상 속 행복의 공간이 아니라 운명 속에 존재하는 현실 속 행복을 가꿀 수 있는 기름진 텃밭이 있다. 이 텃밭을 열심히 일구고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일구어내는 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이 목표로 하는 삶이다. 이런 삶의 자세는 니체가 말한 '운명에 대한 사랑'(아모르 파티, amor fati)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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