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다이어트
스스로 해낸다는 것, 자신이 나아가야 하는 길에 방향키를 내가 주도적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얻게 되는 자유도에서 오는 행복감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어쩌면 다른 사람을 컨트롤하는 일보다 나 자신을 컨트롤하는 일이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아직도 도무지 규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변수 가득한 나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매일매일이 새삼스럽지만 30년 이상 살다 보니 어느 정도 패턴이 보이는 부분이 있긴 하다. 지금 돌아보면 20대는 이것저것 뭘 하든 살이 빠지는 나이였다면 30대부터는 진정한 다이어트 라운드에 진출하는 것이다.
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내가 지금까지 실패해 온 다이어트 인생을 찬찬히 돌아봤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어쩌면 공부를 할 때도 더 잘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힘 빼기보단 하기 싫은 이유를 먼저 분석해 그 부분을 우선적으로 해소하는 게 더 효과가 있을 수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 다행히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라는 걸 진작에 알았으면 그때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었을까..?)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실패한 이유를 가감 없이 적어 보다 보면 생각보다 판단 미스가 크다는 걸 알게 된다. 비교하자면 오늘 이 정도 공부할 수 있겠지, 이 정도 업무량을 쳐낼 수 있겠지, 이 정도 인풋이면 이 정도 아웃풋이 나오겠지, 기대심리를 반영해 은근슬쩍 올려버린 목표가 결론적으론 다이어트를 망친 요인이었다. 요약하자면 다이어트마저도 메타인지가 부족했던 탓이다. 이런 개방적인 곳에 나의 낯부끄러운 실패 사유들을 적어 내리고 싶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공감할 누군가와 이후 언젠가 또 슬럼프에 빠질 나를 위해 적어보려고 한다.
<내가 다이어트에 실패한 이유>
1. 운동을 하면 살이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얼핏 보면 문법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전혀 오류가 없어 보이는 문장이지만 여기엔 큰 함정이 있다. 운동을 ("죽기 전까지 하면") 살이 빠지는 것이다. 운동이란 범위가 말도 안 되게 넓고 사람마다 주관적이기 때문에 규정하기 나름이다. 하다못해 숨쉬기도 운동이라 칭하는 사람이 널렸다. (과거의 나 포함) 그러나 운동으로 살을 빼 본 지금은 안다. 살은 식단을 병행하지 않는 이상 젖 먹은 힘까지 써서 하지 않는 이상 절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영어로 diet는 "식단"이다. 어쩌면 우리나라로 단어 해석이 몸매관리로 곡해되면서 다이어트의 본질이 흐려진 게 아닐까 싶다. 운동을 과대해석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자.
2. 운동하는 나에게 너무 취했다.
운동을 자주 하지 않으면 운동하는 날이 특별한 날이 된다. 다시 말해 운동에 너무 큰 의미부여를 하게 되고 그 어려운 운동을 해냈다는 자체에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당근을 준다. 늘 배가 고프면 오늘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며 운동을 멈추고 보상을 주러 집에 돌아갔다. 애초에 운동은 배가 고플정도로 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운동이 끝나고 헬스장을 나서는 순간 며칠은 굶주린 늑대처럼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눈앞의 먹잇감을 먹어치우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이때 빨리 먹기 때문에 더 많은 양을 먹게 된다. 실제로 운동을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많이 하고 나면 입맛이 사라지곤 한다.
3. 밥을 줄이고 디저트를 늘렸다(?).
밥에 비해 디저트는 양이 작다. 당연히 칼로리로 비교해야 된다는 건 머리로 알지만 눈앞에 디저트가 놓이는 순간 나의 뇌는 자동적으로 상황을 회피해 버린다. 보통 데이트나 친구를 만나면 카페에 간다. 커피만 시키면 아쉬우니 디저트를 시킨다. 친구랑 얘기에 빠져 한입 두 입 정신 차려보면 늘 디저트는 순식간에 사라져 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오늘 밥 적게 먹었으니까" 라며 합리화를 하는 것이 그날의 화룡정점인 것이다.
4. 준비운동 없이 운동을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준비운동, 워밍업의 중요성을 30대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준비운동을 해야지만 어떤 운동을 하더라도 근육통이 없다. 있더라도 덜하다. 예전엔 근육통이 운동을 열심히 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걸 핑계로 은근슬쩍 하루이틀은 운동을 하지 않고 넘어간 적도 많다. 다들 공감할 거라고 생각한다.
준비운동의 한 가지 이점이 더 있다. 기본적으로 그날 하기로 한 계획이 틀어지거나 해내지 못할 때 기분이 확 가라앉곤 하는 사람이지만 운동할 때만큼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결정해 버리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다. 2년째 가고 있는 헬스장이지만 가서 해야 하는 운동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쉬이 떼어지지 않는다. 그럴 때 "준비운동이나 롤러만 하고 오자"라고 나 자신을 회유시킨다. 그렇게 내 게으른 몸뚱이를 움직여 헬스장에 막상 가고 나서 롤러만 하고 돌아온 적은 없다. 뭐든 시작이 반인 것이다.
5. 빼고자 하는 이유나 목표가 명확지 않았다.
예전의 삶을 돌아보면 대체 살은 왜 빼려고 했던 걸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마 마른 친구던 살이 찐 친구던 내 주변 모든 이들은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고 여자라면 으레 다이어트란 생리처럼 어떤 주기가 되면 돌아오는 이벤트라고 볼 수 있다. 사실은 살을 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몸이 무거워도 체력은 좋았고, 옷이야 작아지면 큰 옷을 사면 됐고, 연예인이나 모델이 될 것도 아니고, 삶을 살아가는데 큰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내 성향상 바디프로필을 찍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게 목표가 될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하프 마라톤을 나가 내 한계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러닝머신으로 1~2KM 달리는 것과 20KM 가까이를 달리는 일은 천지차였기 때문이다. 총 3년간 2년간은 10KM 도전을 시작했다. 물론 10KM를 달리는 일이야 준비 없이 이를 악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내 목표는 10KM를 쉬지 않고 달리되 근육통이나 다치는 일 없이 완주를 해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체중 감량과 더불어 근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내가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목표를 찾고 방향성을 확립하는 일은 나에겐 꽤 효과가 있었고 얼마 전 하프 마라톤 완주를 해냈다.
6. 살 빠지는 척도를 무게나 인바디로 판단했다.
내 몸무게는 중학교 2학년에 들어간 이후 앞자리가 5가 된 적이 없었다. 무작정 하루 1끼를 먹으며 다이어트를 감행해 얼굴만 피골이 상접했을 때 겨우 58~59를 보였지만 면역력이 낮아져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어떤 이유에서든 몸무게로 척도를 매기면 도무지 시너지를 낼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오히려 사기만 떨어지고 나 자신이 싫어질 뿐이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장장 20년이 걸렸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지금이라도 받아들였으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인바디를 재러 가면 술을 자주 마시거나 생활이 불규칙하냐는 질문이 따라와 억울하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을뿐더러 이보다 더 규칙적으로 살 순 없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무게나 인바디로 척도를 매기지 않는다. 3년 전 62~3kg을 오갔던 나와 지금 61kg인 나의 몸은 천지차이인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7. 내 몸을 마주하길 싫어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를 마주하는 일이 싫었다. 특히 볼록 튀어나온 배는 정말 싫었다. 그렇지만 내 몸을 정확히 알아야 어디를 중점으로 해야 할지, 어디쯤 와있는 건지 살펴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었다. 대신 내 몸을 싫어하지 않기로 했다. 너무 들떠도 안되지만 너무 다그치지도 않아야 하는, 쉽지 않은 연구대상이다 나는.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번생은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8. 근력운동을 할 때 무조건 무게를 늘려나가려고 했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운동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욕심이 난다. 특히 근력운동은 자꾸만 무게를 늘리며 성장해 나가고 싶은 욕구가 차오른다. 그러다 어느 무게 이상을 들고나면 근육이 생긴다. 그것도 울퉁불퉁하게. 내 몸이지만 정말 보기 싫어진다. 어느 트레이너가 여자는 아무리 근력운동을 해도 남자처럼 근육이 생기진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도 정도 것인가 보다. 이제는 무게를 늘리기보단 횟수를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 울퉁불퉁했던 몸을 바로잡았다. 때론 성에 차지 않을 때도 있지만 횟수를 많이 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다이어트를 하는 주체는 바로 나다. 어떤 연구를 시작하더라도 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한 사전조사는 필수다. 게다가 남이 하라는 연구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게다가 나한테 분명한 이익이 되는 실험이 눈앞에 있다니, 여간 구미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늘 처음은 그렇게 열정이 식을 겨를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왜인지 나에 대한 정보보다 남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고 또 내가 가진 것보단 남들이 가진 좋아 보이는 것들에 눈이 가는 세상에서 나에게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행동까지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짧고 강렬한 콘텐츠가 유행이 된 요즘, 변화도 없어 지루하고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나 자신을 계속해서 관찰한다는 것은 꽤나 끈질긴 집념과 인내가 요구된다. 그러나 그 인내 끝에 오는 결과는 달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