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종희 Jun 14. 2022

<여름은 오래 그 곳에 남아> 그 시절 아름다운 기억

이 책은 감각을 깨운다. 머릿 속에선 장면이 그려지고 어디선가 향기가 나며, 새소리 바람소리 빗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 마치 나도 그 곳에 있는 것 같다. 한동안 비문학 책만 읽다가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니 날 서 있던 이성이 누그러지고 잠자고 있던 감성이 눈을 뜬다. 마음도 따뜻해진다. 주인공이 자신의 24살 시절을 돌아보듯 나도 과거를 돌아보 되서다. '나는 어느 시절이 오래도록 남을까?' 잠시 멈추게 된다. 나 뿐 아니라 읽는 사람 모두 자신의 행복하고 소중했던 순간, 시절을 추억하리라!  


일본의 작가 마쓰시에 마사시(松家 仁之,1958~ )쓴 이 소설은 일본 현대 건축의 거장 '요시무라 준조'를 모델로 그가 가루이자와에 지은 '숲속의 집'을 배경으로 한다. 2006년 발표된 이 작품은 디테일한 묘사와 탁월한 문학적 표현으로 일본에서 큰 호응을 얻었으며 '제64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에 소개되었는데 원제는 <화산자락에서> 이다. 한국어 제목이 원제보다 좀 더 감성적 여운이 남는 것 같다.


'숲속의 집'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니 '가루이자와' 라는 곳이다. 도쿄에서 한 시간 가량 북쪽으로 떨어진 나가노현에 있는 소도시로 해발 고도 1000m 남짓의 고원지대란다. 도쿄 한복판에 비해 최고 기온이 10도 가까이 낮아 일본인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여름 별장, 관광지유명하. '숲속의 집'은 요시무라 준조가 1962년에 지었다는데, 이름 그대로 울창한 나무 숲에 가려져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만큼 작고 소박하다.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 숲속에 들어선 산장 '숲속의 집'

아사마산도  곳에 있는데 활화산이라 아직도 가끔 화산이 분출된다. 원제가 '화산자락'인 것 보니 아사마산의 기슭임을 알 수 있다.  

아사마산과 가루이자와 위치

1. 내용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82년. 주인공 사카니시 도오루는 막 대학을 졸업한 23살의 청년이다. 건축학과를 나온 그는 평소에 존경하던 건축가인 무라이 슌스케의 설계사무소에 지원서를 낸다. 사실 이곳은 몇 년간 신입사원을 채용하지 않았는데, 그는 휠체어 타는 가족이 는 집의 설계도를 동봉하여 지원, 기대치 않케 슌스케의 설계사무소에 채용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슌스케씨는 <국립 현대 도서관> 경합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야기는 무라이 설계사무소 직원들이 프로젝트를 위해 7월 '여름 별장'으로 옮겨 가 합숙하면서 1년 남짓의 평범한 일상을 서정적으로 담고 있다. 그러나 설계가 마무리 될 무렵 슌스케씨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도서관 프로젝트는 경합에 실패한다. 29년이 지난 후 주인공 사카니시는 별장을 다시 찾아오고, 먼지 쌓인 도서관 설계 모형을 보며 추억에 잠긴다.


이야기는 별다른 반전도, 특별한 에피소드도 없이 잔잔하게 그려지지만, 연필이 쓱쓱 써지는 소리, 책과 나무의 냄새, 장작이 타는 모양과 소리들, 홍차를 끓이고 음식을 만드는 장면 .. 인물들의 일상의 모습과 자연의 모습을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묘사해 감수성을 자극한다.


2. 밑줄 긋기

"모든 유리창이 열리고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여름 별장이 천천히 호흡을 되찾아 간다."

"갓 구운 스콘은 밝고 마른 햇볕 냄새가 났다. 차가운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 잼을 스콘 위에 얹어 입으로 가져간다. 온도도 감촉도 각각 다른 단맛이 입 안에서 섞인다."

"감자를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흙은 여름의 아침 햇살을 받아 금방 하얗게 말라간다. 오랜 시간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쪼이고 있던 새끼 곰 등에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면 이런 향기로운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여름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여닫이가 나쁜 문짝 같던 내 행동거지가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이 느껴졌다."

"겨울이 조금 더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올 가을은 유난히 예쁘니까."


특히 슌스케 씨직원들의 건축에 대한 철학, 열정, 신념 등을 볼 수 있는데, 좋은 건축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인물들의 강점에 맞는 역할 분담, 그리고 유기적 연결을 통해 건축물이 탄생하는 과정, 고민도 보여준다. 건축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유명 건축가들과 건축물의 역사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건축에 대해 공부해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후의 나이에도 슌스케씨는 건축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그렇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건축이 잘됐다는 이야기야. ...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하고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또 하나 마지막까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해’라는 건축 용어이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이 설계 플랜에서 해결했을 때 ‘해’라고 쓰는 건축가가 많다. 수학과 달리 건축에는 완벽한 집이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은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중략) 선생님의 국립현대도서관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대로 흘러, 지나간 세월은 이 모형에 사소한 숨결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 플랜의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선생님 플랜에 생명이 불어넣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3. 책에 소개된 건축가와 작품

개인적으로 건축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 재미있었다.

- 요시무라 준조(吉村順三, 1908~1997)

요시무라 준조는 미국에서 더 주목받았던 일본 건축가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임페리얼 호텔을 보고 영감을 받아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유행에 휩쓸리거나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평생 일본 전통 양식과 서양 건축의 조화를 추구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요시무라 준조 -> 김수근 으로 이어지는 건축가의 계보도 알게 되었다.  

요시무라 준조(1908~1997)
주인공이 실측을 위해 들어갔던 아스카야마 교회의 실제 모델인 '산리츠카 교회'


- 에릭 군나르 아스플룬드 (Erik Gunnar Asplund, 1885~1940)

주인공 사카니시는 틈틈이 방에서 스웨덴 건축가 군나르 아스플룬드에 대한 책을 읽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 <스톡홀름 시립도서관>과 <숲의 묘지>가 소개된다.  

1928년에 지어진 스톡홀름 시립도서관. 둥근 원형 책장과 햇빛을 담는 유리 천장, 오래된 책상과 의자, 곳곳에 세면대 배치 등이 특징이다
책이 사람을 감싸는 느낌을 주고, 쉽게 책을 찾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도서관 입구.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상자 안에 들어있는 원통 형태이다.  

또 하나 그의 유명한 작품은 스코그스키코고르덴(Skogskyrkogarden), 즉 <숲의 묘지>이다. 그는 1912년 공동묘지를 지형과 자연의 식물과 조화시켜 설계해 새로운 형태의 묘지를 만들었는데,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곳에는 10만개의 묘지가 있으며 매년 2천 번 이상의 장례식이 열린다고 한다. 5곳의 화장장과 장례식 예배당이 군데 군데 위치해 있어 충분한 명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육체의 부활을 기대하는 기독교 교리가 지배적이었던 유럽 사회에서는 화장이 금기시된 문화였다. 그러나 인구 증가와 도시 과밀화로 인해 토지가 부족해지자 화장과 공동묘지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으면 숲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을 지닌 스웨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에 강력한 거부감을 지닌 사람들의 인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이를 타개할 묘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숲의 묘지란다. 소나무 숲이 가득했던 땅에 화장 묘지를 만들면 자연스레 숲으로 회귀한다는 연상 작용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다. 아스플룬드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스웨덴 사람들의 화장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한 나라의 문화적 인식을 바꾸는데 건축이 큰 영향을 미친 셈이다. 가보고 싶다.

'숲의 묘지' 화장터 입구. 오른쪽 언덕에 나무가 모여 있는 곳을 명상의 언덕이라 부른다
묘지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

20세기 건축의 3대 거장 중 한명이라 불리는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70년간 주택, 학교, 교회, 공공건물, 사무용 등 400 여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간결한 형태를 추구하면서 주변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유기적 건축'을 추구했다. 구겐하임 미술관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의 작품 중 8개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니 그의 업적이 놀랍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축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유니티 샘플, 로비 하우스, 텔리에신, 홀리혹 하우스, 구겐하임 미술관, 첼리에신 웨스트, 제이콥스 하우스, 낙수장
강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세워진 것으로 집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바로 폭포에 닿게 되는 특이한 구조.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위치.
고향이자 그와 가족이 살던 텔리에신. 1911년 지어진 후 증개축을 많이 해 초기와 많이 달라진 모습. 위스콘신 위치   


- 한스 베그네르(Hans Wegner, 1914~2007)

주인공은 도서관 프로젝트에서 의자 디자인을 맡게 되는데, 덴마크의 유명 의자 디자이너 한스 베그네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한스 베그네르는 70여년 동안 500개 이상의 의자를 디자인했으며 공예적인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재료의 혼합과 실험에 도전한 덴마크 가구 디자인의 거장이다. 실용적인 편안함을 중요시하고, 의자의 4가지 요소인 다리, 좌석, 등받이, 팔걸이를 최대한 단순화하는 등 인체공학적인 디자인 연구에 힘을 쏟았다.      

한스 베그네르와 그가 디자인한 의자들


와.. 이렇게 의자도 다양한 발전의 역사가 있는지 몰랐다.


그밖에 수많은 나무들, 새 이름이 나오고, 즐겨 듣는 음악도 나온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하이든 <사계>, 베토벤 교향곡 8번,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 모짜르트 <그랑 파르티타>, 말러 <교향곡 4번>, 블랙 컨템프러리(흑인음악), AOR(Adult Orient Rock) 등등. 중간 중간 찾아 들으니 더 재미가 있었다.




이제 나의 인생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시절이 언제였나 생각해 본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긴 하지만 그 시절이 나의 인생의 방향을... 또 나의 현재를 만든 귀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 자체로도 소중하고!

 

* 책과 관련 정보 등을 참고했습니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김영사, 까사미아 블로그, yes24

 <2022.6.13>

작가의 이전글 <이기적 유전자>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