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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ya Dec 05. 2022

반성문

다시보기_9

  2022년 12월 3일 0시, 나는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눈을 뜨고 일어나면 대한민국의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결과가 나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내심 궁금은 했는지 1시 20분쯤 눈을 떴다.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점수는 1:1.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마음 편히 숙면을 취했다.


  새벽 6시쯤 잠에서 깼다. 실망스러운 소식을 내 눈으로 확인하더라도 그리 놀라지는 말자며 새로고침을 했는데 16강 진출을 축하한다는 문구가 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만우절이거나 해킹을 당한 줄 알았다. 부랴부랴 경기 결과들과 골득실, 다득점 사실까지 파악하고 나서야 '이건 봤어야 했는데.'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다시 12월 3일 0시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초연하게 잠을 선택했을 것이다. 확률상 16강 진출 가능성이 너무 희박했기 때문이다. 그 희박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결국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고 난 뒤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스포츠 경기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갖는 힘을 어느 정도 길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그저 좋지 않은 결과를 보기가 두려워 회피한 것일 뿐이었다.


  주요 뉴스 기사들을 쭉 보고 난 뒤 손흥민 선수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봤다. 그는 경기 후 '저희는 포기하지 않았고 여러분들은 우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가나전이 끝나고 잔뜩 풀이 죽어 있는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일부 언론들은 '최악'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불 난 데 기름을 부었다. 늘 국가대표, 주장, 에이스라는 책임감을 짊어지고 안와골절 부상이라는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 절실하게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이 생각나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손흥민을 비롯한 국가대표 선수들의 부담감과 무게감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선배 선수들의 인터뷰들까지 보고 나니 그들을 응원조차도 하지 않은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KBS 해설위원으로 합류한 구자철은 경기가 끝난 뒤 중계석에서 벤투의 말을 대신 전달했다. "한국이 16강에 진출한 건 역사상 딱 두 번뿐이다. 한 번은 2002 한일 월드컵이다. 워낙 특별한 케이스다. 그거 빼면 한 번밖에 없다. 그런데 왜 너희가 압박감을 느끼냐. 충분히 즐겁게 할 수 있다. 최종예선에서는 부담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지만, 여기선 느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관련 영상, 글을 쓰며 확인해보니 이재성 선수가 네이버 블로그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구자철 선수가 발췌해 소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 박지성 SBS 해설위원과 박주영 선수는 '슛포러브' 유튜브에서 가나전 패배 직후 희망이 남아있음을 강조하며 담담하게 위로를 건넸다.(@관련 영상) 이영표 대한축구협회 부회장(@관련 영상)과 차두리 FC서울 유스 강화 실장(@관련 영상)도 대표팀에 힘을 실어줬다.


  그렇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진지하게 과몰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하나에 꽂히면 깊게 파고드는 성향을 어찌할 수가 없다. 아무튼 전 국가대표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나는 과연 이런 사람, 이런 선배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힘내라, 할 수 있다, 괜찮을 거라는 영혼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작은 희망이라도 잃지 말기를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이렇게 12월 3일 토요일은 하루 종일 유튜브에 올라오는 월드컵 관련 영상들과 파울루 벤투(Paulo Bento, 1969~) 감독의 선임과 부임 이후 이슈들을 쭉 살펴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 생각들을 오랜만에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자료조사 겸 이것저것 검색을 하느라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 과정에서 생각들이 너무 깊게, 넓게 뻗어나가서 글을 쓰면서도 글의 방향을 잡지 못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 와중에도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이 포르투갈을 1골 차이로 이기고, 우루과이가 가나를 상대로 딱 2골 차이로 이기는 그림이 또 나올 수 있을까? 2022년 카타르 월드컵 H조의 결말이 만약 영화, 드라마, 소설 속 결말이었다면 너무 작위적이고 신파적이라는 비판이 따라붙을 것만 같다. 비현실적인 행복한 결말이어서 말이다. 그 정도로 꿈같은 결말이었다.


  한국시간으로 내일(6일) 새벽 4시 브라질과의 16강전 경기가 펼쳐진다. 역시 대한민국의 승리 가능성은 낮다. 무엇보다도 단기전에서 중요한 체력 회복 부분에서도 앞서지 못한다. 지금까지 실컷 희망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줄여서 '중꺾마'라고 했다. 야구선수 요기 베라(Lawrence Peter "Yogi" Berra, 1925~2015)의 명언이기도 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와 같은 맥락의 말일 것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살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격언 중 하나다. 나는 이 말의 힘을 꽤 많이 목격했고,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늘 결과를 보는 건 두렵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파울루 벤투 감독과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늘 말하는 '우리의 축구', '우리의 플레이'를 마음껏 하기를 응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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