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쉽게 빠지는 자기기만의 심리
아폴로의 햇살이 대지를 가열하던 어느 여름날, 한 여우가 기진맥진한 상태로 아테네 근교 포도원을 지나고 있었다. 며칠 전 폭풍우로 먹잇감들이 대피한 탓에 허기가 극에 달했다. 게다가 최근 늑대 무리가 영역을 확장하면서 여우들의 사냥터는 더욱 좁아졌다.
"제우스님, 이러다간 정말 굶어 죽을 것 같습니다. 부디 한 끼 식사라도 제 앞에 보내주시옵소서..."
탄식과 함께 절뚝거리며 걷던 여우의 코끝에 달콤한 향이 스쳤다. 저 멀리 포도나무에 송이송이 매달린 보랏빛 포도가 보였다. 여우는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바라봤다. 최상급 포도원에서나 볼 수 있는 달콤한 디오니소스의 축복이 분명했다.
"아... 이것 참 운이 좋군. 포도라니! 배고픔도 해결하고 목마름도 달랠 수 있겠어."
여우는 힘없는 다리에 힘을 주고 포도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하지만 포도송이는 생각보다 훨씬 높이 매달려있었다. 여우는 안간힘을 써서 뛰어올랐다. 허나 허기로 지친 몸은 그리 높이 뛰어오르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도약. 이번에는 조금 더 높이 뛰어올랐지만 여전히 포도송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세 번째 도전. 네 번째 시도. 다섯 번째 점프. 매번 실패할 때마다 여우의 자존심은 조금씩 상처받기 시작했다.
"흥, 내가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지? 어차피 저 포도는 덜 익어서 시었을 게 분명해."
땅에 털썩 주저앉은 여우의 귀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브 나무 위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여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훗, 여우 나리. 평소엔 그렇게 당당하시더니 이번엔 왜 이리 초라해 보이시나요? 포도가 시다고요? 제가 보기엔 무르익어 꿀처럼 달 것 같은데요?"
까마귀의 조롱에 여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이내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까마귀 양반. 당신도 늙어 눈이 침침해진 모양이구려. 저건 분명 덜 익은 포도요. 시고 떫을 텐데 먹어봤자 이가 상할 뿐이지. 난 처음부터 저런 질 낮은 포도따위는 관심도 없었다오."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한번 맛보고 오죠."
까마귀는 휙 하고 날아가 포도송이를 쪼아 맛을 보았다.
"오호~ 이건 정말 디오니소스의 축복이 내린 포도군요. 달콤하고 과즙도 가득하고... 아~ 여우 나리, 정말 이걸 안 드시겠다니 제가 다 배가 부르네요."
여우는 까마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도도한 걸음걸이로 돌아섰다.
"흥, 당신 같은 맹추는 그런 시큼한 포도나 먹으시오. 난 이만 가보겠소. 마침 저 언덕 너머에 토끼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여우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것은 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신이 서글퍼서였다. 포도원을 떠나며 여우는 중얼거렸다.
"제우스님, 다음생에는 제발 날개를 달아주시든가, 아니면 제 자존심을 조금 덜어주시든가..."
"자기기만(自己欺瞞)"은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불신'(mauvaise foi)이라고도 표현했던 인간의 복잡한 심리 방어기제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자 케빈 오치스너(Kevin Ochsner)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방어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며, 이는 생존을 위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프랜시스 플린(Francis Flynn) 교수는 저서 "Power of Self-Deception"에서 자기기만이 단순한 거짓말과 다른 세 가지 특징을 제시합니다:
1. 무의식적 발생: 자기기만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여우가 "포도가 시다"라고 말할 때,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2. 자아보호 기능: 스탠포드 대학의 자아존중감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자존심 손상을 신체적 고통과 비슷한 수준으로 인식합니다. 여우의 "시다"라는 판단은 상처받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긴급 처방이었습니다.
3. 합리화 과정: 예일대학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인지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한계나 실패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수용하기보다 상황을 재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자기기만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UC버클리의 셀리그만(Seligman) 교수의 연구는 적절한 수준의 자기기만이 우울증 예방과 회복탄력성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문제는 '정도'입니다. 조지타운 대학의 리더십 연구에 따르면, 성공한 리더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균형 잡힌 자기인식'입니다. 즉,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극복 의지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조직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건설적 실패 인정'의 문화입니다. 구글의 '포스트모텀(Post-mortem)' 문화나 NASA의 '실패 보고서' 시스템은 실패를 숨기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그것을 학습의 기회로 전환하는 좋은 예시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기만의 덫에 빠지지 않고, 까마귀처럼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입니다. 때로는 "나는 이것을 할 수 없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난 원래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보다 더 필요할 때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으며, 그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다."
-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프랑스 철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