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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an 11. 2022

[읽다]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2021)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일기

[2022-02 / 에세이]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캐서린 메이. 이유진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21)


유튜브 알고리즘이 ‘아는 변호사’님의 독서 리뷰 영상으로 이끌어 ‘윈터링’이라는 단어에 꽂혀 책을 샀다. 에너지를 최고치로 끌어쓰다가 매년 연말쯤이 되면 번아웃을 경험하는 나이기에, 겨울을 잘 보내야 내년 봄을 수월하게 맞이할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사들인 12월 즈음에는 슬금슬금 읽었다. 내가 불행하지 않고 평온할 때는 남의 슬픔 같은 게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기 마련이다. 저자와 나의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나와 비슷한 나이인데 경험을 토대로 글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구나.’ ‘글에 내공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연말이 되어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상황에 몸과 마음이 한순간 무너졌다가 다시 추스르고를 반복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욕심과 불안 집착이 공존하고 있다. 이성적인 판단이 전혀 이루어지질 않고 그저 버티는 시기에는 글 같은 게 읽히지 않는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더욱 부정적인 생각에 갇히거나, 그저 가라앉기 마련이다. 책을 읽을 수 없던 시기에 윈터링 같은 책은 더더욱 읽을 수 없었다.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 지금, 쳇바퀴처럼 자꾸만 반복되는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 떨쳐버리고 싶고,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제서야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몰입하며 저자가 소개하는 타인의 윈터링을 간접경험 하며 나도 다시 떠오를 수 있겠다는 위안을 얻게 되었다.


이 책은 무언가 거창한 메시지를 건네거나, 자기계발서처럼 교훈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힘든 순간을 묵묵히 살아내는 여러 사람의 경험을 저자의 경험과 자연현상 등으로 섬세하게 설명하는데, 그 담담하고 담백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이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겨울을 맞이해버렸다. 이런 상황을 만들지 말았더라면 하는 자책과 후회 원망과 슬픔 등 무거운 마음이 나를 억누르고 있지만, 책은 ‘수용’하고 ‘지금’을 살라고 이야기한다.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나도 살아야 하니까 머리로 수용과 지금을 곱씹어본다. 더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힘을 빼면 내가 못 살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조차도 힘이 든다. 무겁고 미련한 나의 마음을 들켜버렸다. 그런데도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살아내야 한다고 책은 이야기한다.


성찰의 시간이 나를 성장하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힘든 순간이 찾아오지 않았을 테고, 윈터링을 경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여기서 살아내야 한다. 단지 그뿐이다.






여기 대서양 외곽을 누비는 안드레아의 갑판 위에서, 나의 겨울에 다가가면서, 불현듯 추위는 내가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어처구니없이 넘어지기라도 하면 관절에 얼음을 가져다 댄다. 삶에서도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있을까? (61)


셸리에게 그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빈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저 참아냈다.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셸리는 그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조차 않았다. 그저 살아냈을 뿐이다. (92)


기다린다. 그리고 상황이 나아지면, ‘그것’의 엄중함을 통째로 잊어버린다. 극단으로 떠밀려간 그 부분의 기억은 기꺼이 잊힌다. 삶은 다시 시작되고, 그 경험은 더욱 강렬한 다른 기억들을 만들어가는 힘이 된다. (93)


혹독한 시련으로서의 추위와 어둠이 휘몰아치는 경험, 두 세계 사이의 틈 속에 빠져버리는 감정. 그녀의 말이 맞다. 바로 이것이 윈터링이다. 그 공허함, 이도 저도 아닌 불안정한 바로 그 상태가 그녀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 셸리는 버림받은 아이들과 그녀가 공유하는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찾았다. 그것이 그녀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 구상의 돌파구가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죽은 이들의 세계로부터 돌아와 마침내 혼자 남겨진, 겨울의 심연 속에서 찾아왔다. (95)


나무들은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한다. 떨어진 잎들은 산림층의 뿌리덮개 역할을 하고, 뿌리는 여분의 겨울 수분을 빨아들여 겨울 폭풍에도 끄떡없는 견고한 지지대로 작용한다. 숙성된 솔방울과 견과들은 먹이가 부족한 이 계절에 들쥐와 다람쥐에게 필수 식량을 제공하고, 나무껍질은 동면하는 곤충들의 안식처이자 굶주린 사슴의 영양 공급원이 된다.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이것이 숲의 생명이자 영혼이다. 숲은 조용히 부단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숲은 봄에 갑자기 생명력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새로운 옷을 입고 세상을 다시 마주할 뿐이다. (100)


행복이 하나의 기술이라면, 슬픔 역시 그렇다. 아마도 학창 시절을 거치면서, 혹은 힘든 일들을 거치면서, 우리는 슬픔을 무시해야 한다고, 책가방 속에 슬픔을 쑤셔 박아놓고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때때로 그 또렷한 외침에 귀 기울이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윈터링이다. 슬픔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그것은 슬픔을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의 요소로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우리의 경험 중 최악의 경험을 응시하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치유하고자 애쓰는 용기다. 윈터링은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칼날처럼 첨예하게 느끼는, 직관의 순간이다. (165-166)


우리의 겨울에,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책을 읽고,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을 밀고 나가기보다는 새로운 삶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나면, 무엇이든 붙잡을 수 있다. 그것이 저항할 수 없는 겨울의 선물이다. 겨울은 좋든 싫든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는 새로운 외투로 갈아입어야 겨울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167)


여기에 또 하나의 윈터링의 진실이 놓여 있다. 겨울에는 지혜를 얻게 되며, 겨울이 끝나고 나면 누군가에게 그 지혜를 전해줄 책임이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우리보다 먼저 윈터링을 겪은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도 우리의 책임이다.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 선물 교환과도 같다. 어쩌면 세대에 걸쳐 이어져 온, 평생을 지녀온 타성을 깨는 일이 필요하다. 남들의 불행을 지켜보면서 나라면 절대 취하지 않았을 어떤 방식으로 그들이 스스로 화를 초래했으리라 넘겨짚는 습성은 박정한 태도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롭다. 재앙은 일어난다는 사실, 그리고 재앙이 일어났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게 재앙이 닥치면 우리는 실수한 적도 없고 그릇된 태도를 보인 적도 없음에도 자신을 탓할 거리를 찾아내려고 애쓰며 수치스러운 도피 상태에 빠져든다. 아니면 누군가 탓할 만한 다른 대상을 찾는다. 겨울을 바라보고 그것이 주는 메시지에 진정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원인에 비례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작은 실수가 커다란 재앙을 불러오기도 하며, 삶은 종종 불공평하지만, 우리가 수긍하든 말든 계속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또한 남들의 위기를 좀 더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닥칠 불행의 전조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169-170)


그러나 거기서 나는 일종의 수용에 이르게 되었다. 나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내 앞에 놓인 미래를 받아들이기. 나는 인생의 지금, 이 순간 강하지 못하지만, 이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님을 배웠다. 휴식하고 용납하는 것을 배웠다. 꿈꾸는 것을 배웠다. 나는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한 사람에게 보여주게 될 날을 상상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이것 봐, 네가 북쪽 나라의 빛 아래에 있었단다. (199-200)


삶은 우리에게 결코 단순한 해피엔딩을 안겨주지 않는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원인과 결과의 도덕적 명확성, 그리고 내 행위에 대한 합당한 보상과 처벌이 내가 갈망하는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 모든 것을 설명 가능하게 해주는 삶의 지도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가장 잘한 행동은 눈에 보이지 않고, 내가 한 최악의 행동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이미 속죄하기도 늦어버린 때에 나에게만 드러난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212-213)


“문제는 당신을 고치는 게 아닙니다.” 그는 말했다. “당신의 기준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게 중요한 겁니다.” (…) 도르테에게 이는 희망을 잃어버린 순간이 아니라 마침내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에 적응하라는 초대였다.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삶이 아닌, 자신이 대처해나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세요.’, ‘하루에 한 가지만 하세요.’, ‘일주일에 사교 활동을 두 번이상 하지 마세요.’ 저는 그분 덕분에 인생을 찾았죠.” (238-239)


저는 이제 이 병을 마음의 감기라고 생각해요. 그걸 없애려고 애써 노력을 하지도 않고, 겉으로 괜찮은 척하거나 감추려고 하지도 않아요. 바다에 나가고, 좋은 영양소를 섭취하려고 하고,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괜찮아질 때까지 쉬어요.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 거죠. (242)


저는 아직도 진단을 받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지는 않아요. 이건 제게 아주 긴 여정이었고, 수영은 제가 만들어낸 여러 변화 중 하나일 뿐이에요. 저는 설탕을 줄였고,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고, 산책을 오래 하고, 모두에게 ‘예스’라고 대답하기를 멈췄어요. 일하는 시간도 줄였고요. 이 모든 것이 완충재 역할을 하고 있고, 이런 완충재가 계속 탄탄하게 유지되게 하고 싶어요. 때로는 문제가 생겨서 완충재가 얇아지지만, 그러면 다시 보강하면 돼요. 그 완충재를 잘 지키는 것이 저의 주된 일이에요. 하지만 저는 충분히 멋진 인생을 살고 있어요. (242-243)


현명한 자들은 사소한 여유를 누릴 시간이 없다. 그들은 생존을 위한 일에 몰두한다. (256)


“숨을 참는 것은 숨을 잃는 것이다.” <불안이 주는 지혜>에서 와츠는 늘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만 늘 잊어버리게 되는 진리를 설파한다. 삶은 본래 통제할 수 없다는 것. 우리의 안락과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인 끝없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는 고통은 우리가 이 근본적인 진실에 저항하는 데서 온다고 말한다.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두려움이고, 고통과 싸우는 것은 고통이며, 용감해지려고 애쓰는 것은 겁내는 것이다. 마음이 고통 속에 있으면, 마음은 고통 속에 있다. 사상가에게는 그의 사상 이외에 다른 도구가 없다. 탈출구란 없는 것이다.” 와츠에게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우리가 알고 우리가 감지하는 오늘.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우리가 두뇌의 힘을 가장 많이 쏟아붓는 미래는 전적으로 미지의 불안정한 요소다. “결코 붙잡을 수 없는 도깨비불 같은 것이다.” 다가오지 않은 이 시간에 끝없이 골몰하는 동안,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특별한 것들을 놓치고 만다. 사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전부다. 지금, 여기. 우리가 직접 인지하는 감각. (298-299)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웅진지식하우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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