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건축 여행 #01 도쿄 호류지 보물관
가을, 도쿄의 우에노 공원역의 시끌벅적한 개찰구에서 나왔다. 11월 치고 오후 햇살이 따뜻했다.
우에노 공원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과 대학 캠퍼스, 굵직한 미술관, 공연장 등이 있어 가족부터 풋풋한 연인까지 인파로 가득했다. 공원에 이젤을 펴고 풍경화를 그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도 있어 곳곳에서 예술적인 분위기도 느껴졌다. 혼자만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는 그들의 여유를 닮고 싶었다. 몇 겹으로 쌓여 카펫처럼 푹신해진 낙엽을 밟으며 행선지로 가는 동안 이곳의 자유롭고 들뜬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져 설레었다.
얇고 넓은 분수대를 빙 둘러앉아있는 사람들을 지나니 작은 건널목이 나왔다. 길을 건너면 도쿄 국립 박물관이다. 1000엔에 모두 둘러볼 수 있는 티켓을 구매했지만 이곳에서 내가 가고 싶은 단 한 곳, 다니구치 요시오가 설계한 국립 호류지 보물관이다.
나무로 가려진 좁은 길을 조금 걷다 보면 잔잔한 물가를 마당삼은 직선적이고 모던한 건물이 나온다. 건물을 마주하자 주위가 고요해지고 5분 전의 북적이는 인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뚝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건물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물 위로 길게 이어진 길을 걸어야 한다. 다리이며 유일한 입구이기도 한 다리 위를 걸을 때, 한 걸음 내딛는 순간마다 어쩐지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 위로 걷게 하여 속세에서 벗어나 마음을 다스리고 정화되는 듯한 것을 유도한 설계일까.
얼핏 보고서 일본 전통 목조주택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고만 생각하면 좀 섭섭하다. 좀 더 주의를 기울여서 볼 것은 호류지 보물관 외관에 크게 보이는 직선적이고 널찍한 구조물의 역할. 옆면부터 상부까지 이어진 구조물로 인하여 안과 밖이 만나는 지점이 넓게 설정되고, 그 차양 아래 동시에 외부이자 내부인 장소가 만들어진다.
그 중간지점에서는 건물 내부에 있는 것처럼 안전하게 햇빛이나 비를 피하면서, 건물 외부에 있는 것처럼 잔잔한 바람과 향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연과 건물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자연을 건물 안으로 들여 자연 속에서 이질감을 중화시켜 주는 장치인 것이다.
호류지 보물관 내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넉넉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나에게 이곳을 소개해준 동행자(36세/건축가)가 설명해 준 대로 이곳의 마감을 유심히 살핀다. 건물 안부터 외벽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마감재의 라인, 그 라인의 y축에 맞춰 직각으로 얇게 세워 시선을 방해하지 않는 난간, 그 시선 끝에 건물을 비추는 물과 건너편의 커다란 나무까지. 군더더기 없는 설계와 완벽에 가까운 마감이 도쿄에서의 반나절을 기꺼이 쓸 수 있게 만든다. 이곳에서 나는 고요함이라는 것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호류지가 품은 내부의 보물들을 둘러보고 박물관 2층의 가죽소파에 잠시 앉았다. 커다란 유리창에 정갈하게 분할된 통창으로는 자연의 빛과 나무가 시원하게 보였다. 이런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차분해지고 어제와 다른 내가 된 것만 같았다.
여행을 다녀와서 다니구치 요시오의 다른 건축물을 검색하다 빌딩 숲 한가운데 정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뉴욕의 MOMA에 시선이 멈추었다. MOMA의 놀라운 소장품을 보는 기대감에 비등하게 건물 자체의 모던함, 뉴욕이라는 거대도시에 점찍은 고요한 분위기가 궁금했다.
언젠가 그곳에 방문한 감격스러운 순간을 상상하며 이제 나는 젠 스타일을 떠올릴 때 건축으로 그것을 완벽하게 구현한 다니구치 요시오의 건물들을 떠올릴 것이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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