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67번 시 중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 산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안개의 흐름, 내가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도시의 불빛들.
언제나 멀리 보이는 풍경은 문을 하나 열어주는 기분이다.
“내가 멀리서 바라본 건, 내가 아직 살아보지 않은 것인가?” 이 물음은 단순히 관찰과 체험 사이의 간격을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존재 방식과 인식의 경계를 서성이게 한다.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67번의 시 중 4연인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지극히 개인인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되짚어보게 한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을 고른 이유가 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던 과거를 이어 자발퇴직을 한 현재와 낯선 세계의 사이에 있는 나 자신을 다독이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넘어와 너머 사이의 공간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가 떠올랐다. 높은 절벽 위에 선 한 남자가 안개로 뒤덮인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절벽 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경이를 넘어 저 너머를 바라본다. 산을 올랐던 발밑에는 이미 경험한 것들이 쌓여 있지만, 눈앞에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 힘들게 넘은 산에서 또 먼 산 너머를 보고 있는 그 사이의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곳이다. 과거의 나를 넘어 현재를 딛고 선 오늘은 언제나 불확실성과 불안 사이에서 미래를 향한 희망을 꿈꾼다. 그러나 발을 내딛기 전까지는 그 세계가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은 희망의 상징이자 두려움의 은유가 된다. 새로운 경험을 향한 갈망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동시에 그 갈망은 불확실성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망설인다.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익숙함 속에서 안주하기도 한다.
'바라본다'는 행위는 종종 삶의 어떤 장면을 멀리서 향하게 한다. '멀리서'라는 말은 실제로 관여하지 않거나, 두려움이나 망설임으로 인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본 것이 곧 '살아보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여행지의 풍경을 바라보는 관찰자로 있을 때, 단순한 감상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반면,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우리 내면에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풍경이 인생의 목표나 꿈을 다시 정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나아가 그 체험이 내면의 경험으로 확장되어 삶이 통합되기도 한다.
'살아본다'는 것은 경험이 우리 존재에 의미를 더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장면을 체험하지만, 그중 많은 것은 진정한 경험으로 남지 않는다. 체험은 일어나고 사라질 수 있지만, 경험은 그것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으로 인해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된다. 나는 그것을 '무늬'라 부르고 싶다.
무엇을 하든 끄적거리고 낙서처럼 그려댔다. 표현하고 싶은 내적 갈망이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다.
'자기 무늬'를 만들기 위해 누에처럼 고치를 치고 있다고 자위했다.
누에가 고치를 짓는 동안 자신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짜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느다랗게 자아내는 실은 그저 실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무늬라고. 자기 안에서 태어나고 자기 밖으로 뻗어나가며, 결국에는 날개를 펴서 자기 무늬로 날아오를 것이라고.
멀리서 바라본 것들이 단순한 관찰로 끝난다면 그것은 살아보지 않은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바라봄'이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변화시키며, 선택할 길에 영향을 미쳤다면, 이미 살아본 것에 가깝다. 이는 바라봄과 살아봄의 경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의지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멀리서 바라볼 뿐, 직접적으로 다가가거나 체험하기를 주저한다. 두려워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상처받을 가능성, 혹은 미지에 대한 불안이 늘 서성인다. 이러한 것들이 살아보지 않은 채 머물도록 만든다면, 바라본 것은 '영원히 멀리 있는 것'으로 남을 것이다.
오히려 그 두려움을 넘어서 멀리 있는 것에 손을 내밀기로 결심한다면,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여는 마음의 준비가 된 것이다. 삶은 때로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끌어오는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재발견한다.
퇴직을 결정한 후, 대부분의 친구와 지인들은 말렸다. 원하던 진로를 두고 엄마가 발 벗고 두 팔을 벌려 막아설 때처럼, 멀쩡히 다니는 학교를 왜 그만두냐고 똑같은 말을 했다. 아이들에게 받던 에너지를 이제는 어디서 받느냐, 돈이 많으냐, 믿는 구석이 있느냐, 학교 말고 더 좋은 데가 있느냐, 학교 다니면서 글 쓰고 그리면 되지 않냐 등 그야말로 걱정 반, 우스갯소리 반같은 말들이 어깨를 걸고 다리를 잡았다. 퇴직을 한 것도 늘 멀리서 바라본 것들이 내 삶에서 살아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재고 따졌다면 아직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힘든 선택은 용기를 목마태우고 멀리 바라보는 그곳을 향해 기도하며 나아간다.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월급 더 많이 받고 자식이 더 좋은 학교 가고, 이것이 목적이 되면 그건 리빙이야. 진선미에서 오는 기쁨이 없지. 그러니까 돈은 더 벌지 몰라도 인생이 내내 고된 거야. 진선미를 아는 사람은 밥을 굶어도 웃는다네. 공자가 그러지 않나.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는 식사를 잊어버린다고. 자는 걸 잊고 먹는 걸 잊어. 의식주를 잊어버리는 거지. 그게 진선미의 세계고,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다움'의 세계야. <마지막 수업> 중 이어령
우리는 끊임없이 탐구하며, 탐구 끝에 처음 출발했던 곳에 이르러 그곳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T.S. 엘리엇
멀리서 바라본 것은 단지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있는 자리와 연결된 나의 또 다른 얼굴과 같다. 돌고 돌아왔지만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다. 언제나 과거를 넘어왔고, 저 너머의 공간과 시간을 바라보며 현재를 여전히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안갯속에 감춰진 풍경은 우리가 다가갈 때에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완성된 어떤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삶의 초대장이며, 다가가야 비로소 이해되는 존재의 또 다른 면모다.
결국 우리가 서 있는 현재라는 공간은 어제의 나를 넘어선 자리이며, 내일의 가능성을 향한 출발점이다.
멀리서 바라본 것과 실제로 살아본 것의 경계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이 경계는 오늘의 선택과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 꿈꾸고 멀리 있는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딜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세계를 마음속에서 곱씹으며 또 다른 꿈을 그릴 수도 있다. 세상은 항상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 늘 예측할 수 없고, 낯설며, 때로는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의 본질은 살아있음으로 바라보고 움직이게 한다.
“내가 멀리서 바라본 건, 내가 아직 살아보지 않은 것인가?”
당신은 네루다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겠는가
mocalemon
누에가 실을 뽑는다
어둠 속에서 끝없이 길을 내고
길 따라 제 몸을 감는다
고치는 헐겁다
동여매고 풀리며 저 혼자 흘러간다
고치는 벽이 아니다
차라리 무너질 수 없는 공기다
울타리가 아니다
들리지 않는 숨의 결이다
아직 날개도 없으면서
어느 먼 하늘을 떠올리는지
넘어와 너머 사이
바람 한 점 없이도 떨리는 몸짓
흔들리고 풀리고 다시 이어진다
태어나지 않은 날개
그날이 오면
고치의 잔해는
날개의 미로 속 옹이로 박혀 있을 것이다
질문 속에 피어나는 아포리즘
삶은 끊임없이 바라봄과 살아봄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정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찾아간다
Life is a process that constantly crosses
the boundaries of looking at and living.
We find ourselves in it
내가 만드는 아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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