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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레몬 Dec 09. 2024

우리 삶은 두 개의 모호한 명확성 사이의 터널이 아닐까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35번 시 중


비상계엄이 발령된 밤부터 온갖 감정이 들락거린다. 두려움, 분노, 창피함, 슬픔, 원망, 희망으로 엉킨 충동이 거친 파도처럼 요동친다. 개인적 심리를 넘어 국민인 우리의 정서적 충격이 넘나들었고, 며칠 동안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라앉지 않는 마음의 무게를 안고 네루다의 질문과 마주한다. <질문의 책> 시집 원문을 찾아보지 못했다. 정현종 선생님의 번역으로 네루다의 질문을 해석하고 답변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정답이 없는 질문. 읽는 이가 질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내면의 흐름이나 과정도 분명히 다를 것이다.


"우리 삶은 두 개의 모호한 명확성 사이의 터널이 아닐까" 이 질문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 35번 시의 첫째 연이다. 이 질문을 풀고 싶은 심정은 시적 상상보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뒤척이는 안타까움이 더 크다. 우리가 함께 목도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가까운 미래를 연결하기에는 너무도 모호하고 명확한 그 어느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루다의 질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는 조국인 칠레의 정치에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며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한 질문이 아닐지 추측해 본다.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이 질문은 누구나 미래의 모호함 속에서 살아가는 나, 너, 우리를 아우른다. 동시에 현실이라는 명확성 속에서 진실과 거짓의 충돌을 마주한다. 삶은 터널처럼 모호한 것이지만, 그 모호함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잔인하리만큼 명확한 진실을 마주한다. 그 명확성은 종종 사랑과 정반대인 폭력의 형태로 다가오기도 하고 우리를 흔든다.


며칠 동안의 어둠 속에서 느낀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취약한가 하는 것이다. 권력이 자행하는 폭력, 폭동에 굴복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터널의 벽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정의를 외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 정의가 새로운 폭주를 낳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빛은 어둠을 배경으로 빛나지만, 그 빛이 진실로 출구로 이어질런지 알 수 없는 것도 우리의 삶이다.


한강 작가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그간 걸어온 글쓰기 여정을 '빛과 실'이란 강연에 담았다. 그리고 자신의 글쓰기가 결국 사랑으로 향하고 있었음을 이야기했다.


2010년 작 <바람이 분다, 가라>는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은 질문이 핵심이다.
2011년 작 <희랍어 시간>은 온기가 머무는 쪽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묻는다. “영원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의 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연한 부분을 보여준다. (중략)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작가는 “2021년 가을까지 줄곧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 왔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2~3년 전부터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됐다”며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되물었다. 여덟 살 한강이 사랑이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라고 했듯 말이다. 그 사랑의 정체는 결국 ‘연결’이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 주었고, 연결되어 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한강의 스톡홀름 강연 기사 인용>


사랑과 폭력은 인간의 심연에서 태어나 현재를 살게 하는 에너지이다. 반면, 상처를 남기며 때론 감당하기 힘든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권력의 난폭함 속에서도 서로를 잇는 힘이자, 우리가 터널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실이다.

윤석열 정부의 폭력은 마치 터널의 벽처럼 단단하게 우리를 가둔다. 폭력은 빛을 막고, 희망을 왜곡한다.

그래서 빛을 보려는 노력은 더 치열해진다. 폭력의 명확성이 우리를 집어삼키려 할 때, 우리는 모호한 미래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다. 터널 속 어둠이 깊어질수록, 작은 빛의 존재는 더 강렬하다. 그것은 사랑의 힘인 동시에 저항의 힘이자 살아내고자 하는 본능이다. 우리는 기꺼이 그 빛을 따라 걷는다.


삶은 네루다가 말한 것처럼 터널이라 말하고 싶다. 터널 안에서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버티고 살고 살아낸다. 왜냐하면 사랑은 빛을 잇는 실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실을 붙들고 빛을 향해 걸어간다. 출구가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어도, 그 걸음은 우리가 사랑을 통해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한다. '두 개의 모호한 명확성 사이의 터널' 속에서도 빛을 찾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다.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면서, 식구들의 밥을 생각하며 마트에서 재료를 찾는 일상 말이다.

내일 아침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서로를 껴안으며 기도하고 평안한 잠을 청하는 일상 말이다.



< by pixabay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캘커타 마더 테레사 본부 벽에 붙어 있는 시>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시인 엮음. 오래된 미래. 2005. 출처




질문 속에 피어나는 아포리즘

모호함 속에서도 길을 찾는 걸음이 삶을 명확하게 만든다

Even in ambiguity, the steps to find a way

make life clear.


내가 만드는 아포리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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