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박9일 전국투어(2)
[미리미리]
시간에 쫓겨서 준비하는 병이 있다. 첫 인턴을 합격했던 회사에 출근하던 날, 준비해야하는 서류 다섯 가지 중 한가지 밖에 마련을 못한 내 자신에게 환멸감을 느낀 적이 있다. 이른 시간에 후배에게 학교 서류 행정 처리를 부탁하고 PC방 여러 곳을 돌며 인쇄를 겨우 끝마쳤다. ‘이제부턴 정말.. ‘이라는, 쓰지 않는 것이 좋은 말을 써가며 결기에 찬 다짐을 했다.
약 한달 간은 첫 출근날의 악몽으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게으름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진부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랬다. 나의 오래된 병은 재발했고 예외없이 이번 여행을 준비할때도 적용되었다. 분명히 여행 깃발은 3주전부터, 단체티는 2주전부터 제작을 시작했는데 출발 당일까지도 무엇 하나 온전한 상태로 내 손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이런 마법 같은 상황이! 단체티를 택배로 받을 시간도 없었기에 직접 수령해 전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던 건, 책임감에 짓눌려서 였다.
앞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것보다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맞는 것 같다. 미완성된 것들과, 무거운 짐, 내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여행 멤버들을 저녁 9시 쯤 만나 고즈넉한 한옥마을을 휘적거리며 내팽개쳐졌다. 드디어 우리는 만났고, 어둑해진 전주는 운치있었다. 내 단점을 쉽사리 고치기에는, 난 너무나도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다. 오늘도 여전히 늦장을 부리며 이틀이나 늦어진 업무를 수행 중이다. 아직 나는 병상에 있다.
[온도]
나는 초코하임을 얼려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바삭한 과자 속의 초코가 적당히 녹아있는 상태에서 한입 베어 물었을때의 맛과 식감은 완벽하다. 차갑게 얼어 똑 부러지는 초코하임은 내 입맛에는 최악이지만, 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맛있다고 한다.
음식도, 호르몬도, 인생도, 저마다의 온도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생성되는 취향도 제각각이다. 냉각된(그러니까 절제된) 달달함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뜨겁도록 달콤함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서로간 아무런 노력없이 각자 기대하는 온도가 딱 들어맞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따라서 그러한 관계를 보면 혹자는 이를 ‘인연’이라고 정의내린다.
우리 다섯 명 중 한 명은 에어컨 바람만 쐬면 콧물이 나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두 명은 자다 깨서 바닥을 더듬거리며 남는 이불을 모두 끌어안고 자야할 만큼 추위를 많이 타는 이들이었다. 한 명은 에어컨 바람이 없으면 급속도로 텐션이 저하되는 특징이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취향 따위없이 곤히 잘 자는 인물이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은 두꺼운 이불을 찾아가며 보낸 밤이었고,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은 미안함에 에어컨을 껐다 켰다 하느라 지샌 밤이었다. 적정 온도가 다를지라도 배려와 인내로 그 간극을 메워주는 관계는, 그날의 ‘우리’라고 믿고 싶다. 전주에서의 첫 날은 이렇듯 미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