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나무 Apr 09. 2018

광고인의 직업병

의사결정 기피증

광고 일은 의사결정의 연속이다 

광고를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에 맞는 사고체계가 갖추어졌고 이제는 고치기가 힘들어졌다. 


난 원래 굉장히 무던한 사람이었고, 의사결정의 첫 번째 가치는 속도였다. 귀찮기 짝이 없는 사고의 과정을 빠르게 종결하는 것이 나 스스로를 위한 가장 큰 미덕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은 직관이 지배하였고 결과는 가능한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친구들과 놀러 갈 펜션을 선택할 때도 이것저것 따지기보다는 사진 한 장에서 오는 느낌으로 빠른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기대했던 오션뷰가 화장실 쪽창문으로만 보인다고 해도 크게 후회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광고 일을 하고 난 뒤 변화가 생겼다. 의사결정을 할 때 과정이라는 것이 생겼다. 속도를 우선하며 과정 없이 직관을 맹신하던 젊은 나는 이제 사라졌다. 

목표를 설정하고 문제를 파악하여 솔루션을 찾아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몸에 베였다. 대화를 할 때도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가 아닌 공감을 필요로 하는 대화는 길어질수록 집중력을 잃고 지치게 되었다. 


일을 할 때는 일을 하는데 적합하게 세팅된 나의 사고 회로가 무척 도움이 되었다. 기계적으로 사고 회로가 가동되어 어떤 일이든 꼭 필요한 결론을 찾아간다. 과정이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솔루션이 마땅치 않더라도 다시 과정을 되짚다 보면 효과적으로 수정이 가능하다. 모든 의사결정 과정이 생산적이고 낭비할 게 없다.  


문제는 일상생활에서도 나의 의지와 반하여 이 사고체계가 가동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난 그런 성향의 사람이 아닌지라 일상생활에 이런 과정이 생겨난 것이 꽤나 곤욕이다. 매우 피곤하다. 와이프가 사 온 동양화스러운 액자를 걸 위치를 결정하는데도 전체적인 집의 인테리어 컨셉을 고려하게 되고 다른 장식품을 걸었을 때와의 기회비용까지 계산하게 된다. 

와이프가 물어본 질문 ‘액자 여기에 걸면 어때? 이뻐?’라는 질문은 아마도 본인이 심사숙고해 구입해온 액자가 진짜 이쁜지 집과 어울리는지의 판단보다는 공감을 통해 자신의 결정에 안심을 더해 주길 원했을 것이다. 난 그저 ‘어 이뻐! 잘 어울린다. 수평이 안 맞으니 오른쪽을 조금 올려야겠어.’라고 대답했다면 완벽한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아쉽지만 나의 대답은 그렇지 못했다.

"새로 산 액자가 가장 잘 어울리는 위치를 잡기 위해선 (Goal setting) 

먼저 집 전체의 컨셉을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 집은 북유럽과 엔틱이 혼재되어 있어! (Barrier Finding)  

거실은 북유럽 스타일의 소품이 많으니 동양화 액자는 어울림을 위해 엔틱 소품이 많은 주방 쪽에 거는 게 좋겠어 (Solution) 

난 개인적으로 모던과 미니멀리즘이 좋아서 너무 프뢉이 많은 건 별로야 (부부 사이를 망치는 그냥 개소리…)



이리하여 나는. 일상생활 중에는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어떤 사안이라도 절대 사고 체계를 가동하지 않는다. 다행히 주관이 강하고 독립적인 와이프에 의해 가정은 순조롭게 기획 및 운영되고 있으며 난 주인님이 세세하게 입력한 명령어에 따라 손과 발을 움직일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광고대행사 입사를 위한 팁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