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민아 Sep 22. 2021

선 사과 후 결투

쌈닭 부인의 난중일기

요즘 남편은 참 잘 삐진다. 이번에는 뭐 때문에 삐졌는지 모르겠지만(대충 알 것 같지만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음) 오늘도 아침부터 내가 하기 싫어하는 짓들만 골라했다. 평소 같았으면 늦잠 자는 남편을 당장 일으켜 세워 비몽사몽인 표정 앞에다 잔소리 총알을 와다다다다 발사했을 텐데 오늘은 참았다. 그리고 언제까지 저 유치한 짓을 이어나가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정오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버팅기는 남편을 두고 도저히 감정을 절제할 수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왔다.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서 나오는 길, 선선한 가을 바람을 쐬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귀가 후 남편 얼굴을 보니 다시 내 표정은 녹이 슬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어제 어머님께 받은 몇 가지 반찬을 대충 꺼내어 두 남자를 불러 모았다. 이도는 눈치가 빠른 아이다. 식탁을 둘러싸고 있는 암흑의 기운을 재빠르게 감지하곤 내 표정과 아빠 표정을 번갈아 훔쳐본다. 나는 이 상황에 더 화가 나서 도저히 식사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내 고등학교 때 별명은 쌈닭.(이유는 생략하겠다) 나의 불같은 성격상 당장 크게 한 판 떠야 하는데, 아이가 옆에 있다. 아이가 밤잠 잘 때까지 무려 9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화가 삭히지 않는다. 화장실 거울에는 울그락 불그락 푸드덕 대고 있는 쌈닭 한 마리가 있었다.



오래간만에 전술을 바꿔보기로 했다. 하나의 전략을 너무 자주 쓰면 그것 역시 더 이상 전략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병서인 [손자병법]에서 손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길 수 없는 것은 나에게 달렸고, 이길 수 있는 것은 적에게 달렸다' (부부싸움 하나에 손자병법까지 나왔다. 참나.)

지금 내가 감정적으로 달려들면 분명 이길 수 없을 테고 상황은 더 악화될 테니 우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 이길 수 있으려면 적의 태도나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건 순전히 나에게 달렸다. 지금 적의 날 선 텐션은 분명 나로 인해 야기된 것이므로, 내가 적을 자극시킨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해소한 뒤에 공격해야 한다. 아마 적이 반응한 그 문제는 바로 나의 태도와 말투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도연 뺨치는 연기로 태도와 말투를 바꾸어 적에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어린아이들이 싸우면 어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싸움의 기술 중 하나인 '먼저 사과하기' 전술을 택해 적에게 접근했다. 쌈닭은 날 선 깃털을 내린 뒤 적진의 후방으로 가서 적을 꼭 껴안고 애교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다.(진짜 미안한 거 하나 없는데 말이다) 남편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려 했지만, 뒤에서 껌딱지처럼 매달린 내가 마냥 싫지는 않은지 표정은 한층 누그러졌다. 계속 껴안은 상태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니, 이도도 다가와서 내 뒤에 붙는다. 상대 진영에 지원군까지 달라붙어 파죽지세로 엉겨 붙으니 적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오후, 남편은 아주 자상한 아빠가 되어 아이와 놀고 있다. 나는 그 틈을 타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전세가 뒤집혔으니, 나는 다시 전략을 세울 것이다. 선 사과 후 결투. 다시 오늘 밤 이도가 잠들면 결투를 신청할 것이다. 한 발 물러났으니 두 발 전진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 중에 일기를 쓰셔서 [난중일기]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기셨다. 그렇다면 나는 투닥투닥 부부싸움 중 얻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글로 남겨 브런치 북이라는 결과물을 남겨봐야겠다. 오늘도 나에게 글감을 던져 준 남편(적)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하며, 이렇게 한 편의 글이라는 전리품을 얻고 돌아간다.



이 가정에 평화가 있기를_

작가의 이전글 너에게 주고픈 3k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