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부지,
아마도 나는 언젠가 마흔이 넘으면
서울이 아닌 어느 곳에 작은 내 집이 있고 빨래를 널어 말릴 마당이나 그게 아니면 작은 서재가 있고,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운이 좋으면 내 이름의 책, 전혀 안 팔리는 책이어도 좋은 그런 책이 서점 구석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사람이 돼있을 거라고 그게 실패하지 않는 삶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전부 다 이루진 못하더라도 그중에 하나 아니면 두 개쯤 손에 쥐고서
다른 가지지 못한 것들을 부러워하는 인생,
그게 내 마흔쯤의 모습이라고 그게 아니면 안 된다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무엇이 이토록 두려운 걸까요.
아버지, 어쩌면 나는 아버지한테 언젠가 이 말을 하게 되는 일이 사는 내내 가장 두려웠던 일 같아요.
아버지 나는 사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되지 못한 긴 시간 동안 내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사실 저도 무슨 일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건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냥 누군가 들으면 고작 그런 일로 죽겠다는 생각을 했냐며
화를 내거나 비웃을지도 모를 그런 작고 흔한 일들이 제게도 있었을 뿐이니까요.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그런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서 죄송해요.
나를 구하지 못해서 나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인간실격 이부정 役 전도연 대사 -
얼마 전 JT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인간실격]의 한 대사다. 대사라고 하기엔 꽤 긴 이 글은 극 중 여주인공 이부정이 자신의 유서에 적은 글이다. 이부정 역으로 배우 전도연이 열연했는데, 전도연 특유의 '덤덤하지만 담대한' 목소리로 모놀로그를 하며 이 글을 읊는다. 배우 내레이션의 어투와 속도가 타이핑으로 받아 적기 딱 좋았다. 이 내레이션은_ 세수를 갓 하고 나온 사람의 얼굴처럼 꾸밈없고 깨끗한 주인공의 유서다. 가식이나 허영 하나 없다. 그리고 주인공의 고단함과 허망함이 느껴진다.
많은 이들이 주인공의 유서에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지금 이 날까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자기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고 연민하며 자책해왔는지. 그건 자기 자신만이 안다. 주변 사람들이 누구이며 자신이 처한 환경이 어떻든 간에, 누구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가슴에 품고 알을 깨어 나오려 했지만 여전히 자기가 만든 껍데기에 갇혀 허둥지둥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매일 같이 징그럽게 찾아오는 아침 햇살과 그 햇살 이후 견뎌야 할 일상들은 고통이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신이 창조한 인간이기에 지독히 스며 나오는 한 생명체의 생(生)의 의지는 참으로 잔인하다. 죽기보다 싫은 하루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목이 메는 희망과 욕심을 포기 못하며 살고 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괜찮아질까 봐.
오늘 내 옆의 누군가는 어젯밤 술을 한 잔 걸치고 애절한 음악을 들으며 울다 지쳐 잠이 들었을지 모른다. 그들의 유년 시절, 그들이 동경한 마흔 언저리 즈음 모습은 절대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려왔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노력의 결과를 반의 반도 못 이룬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부정이와 같은 유서를 썼을 것이다. 오늘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그런 대단한 이유'가 아닌 이유로 마지못해 사는 사람들이 있다. 드라마 인간실격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을 코트의 흔들리는 끝자락처럼 스치듯 다가온 드라마였다. 이미 자신의 삶에서 실격된 사람들이, 자격 미달된 생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더 애쓰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갈 자격을 갖고 있는지.
- 공복 글쓰기 / 조민아